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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박헌영 평전

by 아키텍트류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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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자신의 왕과의 투쟁을 통해 스스로 봉건 체제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워 평등과 자유를 쟁취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이 한창이던 19세기말, 일본은 국왕 메이지가 주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불과 30년 만에 동양 최강의 제국주의 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어린 아들을 대신해 정권을 잡은 대원군 이하응은 서구 문명의 유입을 거부하고 철저한 쇄국정책을 택했다.

대원군은 여러 차례 서양의 침략자들의 상륙을 막고 스스로 침략을 물리쳤다고 기세등등했고, 서양 문화의 유입을 막기 위해 가톨릭 선교사와 신도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렇듯 조선말 부터 시작된 국운의 종말은 뒤이은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접어들면서 마치 우리 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공산주의는 지금도 두려움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념 문제는 여전히 최대의 쟁점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70년째 적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남북이 통일되어 극단적인 좌우 대립이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계급 갈등으로 완화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주요 모순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박헌영은 그 모순의 최고 정점에 올라가 있는 인물의 한 명이다. 

박헌영 평전을 더듬어보면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보인다.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와 증언만으로 보건대, 박헌영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는 불필요한 정치 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했다.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지만,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다. 표범처럼 단단한 인상에 좀처럼 웃지 않는 과묵함 그리고 비밀주의적인 성향은 지하운동의 지도자에게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공개 정당의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 자료로 살펴보면, 그가 미국이 간첩 노릇을 했거나 비겁자인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식민지 후반기 동안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조직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해방되자 그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한 데 그 이유가 있다. 원칙적이고 교조적인 성향이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그의 면모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공산당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인도 영웅도 아닌 그에게서 한 시대의 혁명가였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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