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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개소문 (과연 영웅인가 역적인가?)

by 아키텍트류 2020.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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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또는 천개소문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5 부족 연맹체(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구성되어있었고 이중 소노부를 비류부 또는 연노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연노부를 연개소문의 집안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는 막리지로 고구려에서 최고 실권을 갖은 군대 지휘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버지 연태조가 죽은 후 어려서부터 포악했던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막리지 직위를 이어받는데 주변 귀족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삼국사기를 썼던 김부식은 신라의 김유신을 영웅시하기 위해 연개소문을 평가절하하려했던 것도 어느 정도 있었을 듯합니다. 아무튼 막리지가 되지 못한 연개소문은 직접 귀족들을 찾아가서 자신에게 막리지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합니다.

결국 막리지의 지위를 차지한 연개소문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주변의 귀족들을 모두 제거하고 심지어 영류왕까지 죽였다고 하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압정치를 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조선상고사를 썻던 신채호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를 멸망시켰던 고구려의 군부는 중국 대륙세력과 진검승부를 하자고 주장했던 세력과 수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통일시켰던 당나라와 친교 정책을 추진하고 남쪽의 신라와 백제에 압력을 가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연개소문은 이에 반대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에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니 차라리 같이 힘을 합쳐서 중국과 싸우자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이를 "서진남수 정책"(남쪽을 지키고 서쪽으로 나아가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서진남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영류왕과 갈등관계에 돌입하게 되고 좌천(?)되어서 천리장성 축조의 책임자가 됩니다. 하지만 당시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고 이는 곳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게 되어 백성들은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게다가 영류왕와 일부 귀족들이 결탁해서 연개소문을 암살할 계획까지 하게 되자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군대 사열식을 가장해서 영류왕과 귀족들을 모두 제거하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지방의 군벌들은 왕과 귀족을 죽인 연개소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 군벌들 사이에서 "서수남진 정책" 보다는 당나라와 전쟁을 해서 세력을 대륙으로 넓히고자 했던 여론이 훨씬 더 강했다고 추측이 됩니다. 당시 연개소문은 고구려 군벌들에게는 공포감 또는 리더십을 가졌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안탑깝게 생각했던 것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이기고 중국 내륙을 정벌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과 중앙귀족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중국의 당나라가 중국의 통일 국가되고 안정화되어서 이제 고구려는 오히려 당나라에 대비해 수비를 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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