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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노무현 대통령 생애

by 아키텍트류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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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대창 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합니다. 성적이 무척 우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청소년기 노무현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를 하는 등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비행청소년이었습니다.

상당히 반항적이고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노무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사법시험을 병행했고 군을 제대한 후 권양순과 1972년 결혼하고, 1975년 30세에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당시 고졸 합격자는 노무현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당시 합격자 총원이 60명 그나마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가는 부분입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성적이 우수했고 그 결고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합니다.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인 "부림 사건"의 변호를 맞게 되면서 그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뒤바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부림사건은 청년들이 영장 없이 체포, 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공산주의자로 조작되고 재판을 받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이 사건에 대해 무료로 변론에 나서게 되고 국가보안법이 악용될 시기에 이 사건이 얼마나 정권의 도구로써 악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계기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여러 시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변론을 맡기도 하고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차리기도 합니다. 

또한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서서 재야에서 인권 변호사와 노동자들을 위한 변호를 하던 노무현은 통일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하게됩니다. 13대 총선에 출마해서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이후 1988년 5 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장세동, 안현태, 정주영 등을 상대로 논리적인 질의를 펼쳐 청문회 스타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후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1995년 부산시장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게됩니다.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노무현도 통합민주당에 합류합니다. 김대중이 1995년 정계에 복귀를 선언하고 김영삼 대통령 이후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 6년 만에 국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다음 선거인 16대 총선에서 어느 정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스스로 포기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며 부산 북, 강서을 지역구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오히려 "노사모"가 생겨났고 그의 유명한 별명인 "바보"라는 별명이 이때 생기게됩니다.

 

노무현은 선거에는 패배했지만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경험이었던 김대중 정권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자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국민 경선이 시작되고 노무현도 후보로 참여해 당시 1위 후보였던 이인제를 극적으로 앞서 대선후보로 선출됩니다. 드디어 16대 대선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와 57만 표 차이로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역전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이 콤플렉스었던 고졸 출신에 유일하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양복 한 벌 변변한 것을 맞출 수 없었던 그는 연수원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으로 판사까지 임용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어려운 길을 나아간다고 해서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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