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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극도로 혐오했고 부정했다는 사실은 과학사에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양자역학이 "확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물리학과 분명하게 구분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The fabric of the cosmos)에 양자역학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미시세계의 실체와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경험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의외의 사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물리학의 시각에서 보면 나름 안정성과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원자적 규모에서 볼 때 우리가 거시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 예를 들면 달을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달까지 거리가 엄청나게 멀고 넓게 퍼져 있는 확률파동 또한 아주 작은 지역을 제외하면 모든 곳에서 빠르게 0으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이 내쉰 공기 속의 전자 하나가 잠시 후에 달의 뒷면에서 발견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또한 대기 속에 들어 있는 전자의 개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전자가 달의 뒤쪽으로 이동할 확률도 그렇게 작은데, 무수히 많은 전자들이 일제히 이동할 확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확률적 특성이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대충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자연의 근본적인 특성을 매우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 실체의 구성요소에 관한 기존의 믿은은 그 앞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아왔다.
양자역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인슈타인도 확률파동이 미시세계의 실험결과를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오류를 찾아내는 대신, 양자역학은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정말 궁극적인 이론이 무엇인지는 아인슈타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양자역학보다 덜 기괴하고 더욱 심오한 이론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양자역학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매우 미묘한 논리를 완성시켰다. 1927년 솔베이 연구소에서 개최된 제5회 물리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자의 확률파동이 아무리 넓은 영역에 퍼져 있다 해도,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면 항상 하나의 정확한 값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확률파동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더욱 정확한 서술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마주친 과도적 개념일 수도 있다. 궁극적인 이론은 전자의 위치를 아무런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전자가 X라는 위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전자가 우리에게 발견되기 전에 X 또는 그 근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확률파동으로 전자의 위치를 서술하는 양자역학은 전자의 물리적 실체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양자역학은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간단명료하면서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입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되었을 때 "이 입자는 우리에게 발견되기 직전에 이곳, 또는 이 근처에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발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는 궁극적인 이론이 발견된다면, 확률을 운운하면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양자역학은 그날로 폐기 처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그 동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논리가 "전자는 단 하나의 정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고전적인 관념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어의 관점에서 보면, 전자의 위치를 관측하기 전에는 위치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관측되지 않은 전자는 분명한 위치라는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위치에 관하여 전자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확률파동이 전부이다. 전자가 명확한 위치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았을 때 뿐이다. 관측을 하기 전에 전자의 위치는 간섭효과를 일으키는 확률파동으로 서술된다. 전자는 정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는 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보어의 관점에 따르면 전자를 관측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전자의 실체가 아니다. 측정행위 자체가 전자를 교란시켜서 확률파동이 붕괴도고 그때 비로소 전자의 위치는 하나의 명확한 값으로 나타난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리를 일상적인 스케일로 확장시켜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우리가 달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그곳에 없다는 말인가?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양자역학을 신봉하는 물리학자들도 이에 물러서지 않고 "숲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의 비유를 들면서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달의 위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그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가 달을 바라보건, 바라보지 않건 간에 달은 항상 그곳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양자론자들도 설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반박하는 두 번째 논문이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자, 시계, 자동카메라 등이 장착되어 있는 상상 속의 기계장치를 동원하여 전자는 관측되기 전에도 명확한 속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숙소로 돌아가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드디어 아인슈타인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논리를 완성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논리의 핵심이 일반상대성이론이었다는 점이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반론을 제기할 때, 자신이 탄생시킨 일반상대성 이론의 대원리(중력이 시간을 변형시킨다는 원리)를 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아이인슈타인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새로운 주장은 오히려 보어에게 새로운 영감을 자극하여 양자역학을 옹호하는 새로운 논리를 제공하고 말았다.
결국, 양자역학에 학고한 논리를 부여한 장본인은 양자역학을 그토록 반대했던 아인슈타인 자신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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