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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마라톤전투,테르모필레전투,살라미스해전)

by 아키텍트류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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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지중해 지역의 패권국가였던 페르시아의 이해가 필요하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미국과 같은 초 강대국이었다. 영토의 크기 역시 방대해서 지금의 중국땅의 약 2/3 수준으로 엄청난 대제국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대제국을 관리하기 위해선 2가지가 필요한데 첫 번째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관리를 파견하는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이다. 

 당시에는 지역이 워낙 광활해서 변방에서 관리가 제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알 수 없었고 지방 세력에게 그 권력을 넘겨줄 경우 반란과 같은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기 때문에 중앙집권국가를 만드는 것은 절대적인 필요조건이었다.두번째는 도로망이었다. 다리우스 1세 때 건설된 도로망은 총길이 약 2,700킬로미터에 이르는 페르시아 제국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는데 이 길을 "왕의 길"로 불렸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부를 만한 왕의 길은 우리나라 역참제도처럼 중간중간에 역이 설치되어 있어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전령만이 다닐 수 있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놀라운 시스템을 보고 문화충격으 받아 "세상에서 페르시아의 전령들보다 빠르게 여행하는 것은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은 최고의 속력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으 ㄹ제지할 수 없다"라고 감탄했다.이처럼 강대한 대제국에 맞선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연합체는 말이 좋아 도시국가이지 페르시아 입장에서 봤을 땐 그야말로 변방의 깡촌에 불가했다.   그런 그리스 특히,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들이 이오니아 지방(지금의 터키 서남부 지역)의 작은 그리스계 이주민 도시 국가 밀레투스에서 페르시아에 대적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반란의 주도 세력이 바로 아테네란 사실을 알고 페르시아에선 아테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다리우스 1세는 병력을 수륙 병진으로 그리스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게다가 수군이 풍량을 맞아 모두 수장되면서 페르시아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하게 된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이 원정을 많은 역사가들은 0차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드디어 BC490년 페르시아 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리스를 침공한다. 이것이 1차 페르시아 전쟁이라 한다. 페르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응답이 현재 종교축제 기간이라 이 기간에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축제가 끝나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 전체가 풍전등화 상황에 놓이게 되자 아테네는 단독으로 작전을 펼치기로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이 마라톤 평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테네군은 동맹도시 플라타이아이 보병 1,000명을 포함해 9,600명의 중장보병으로 맞섰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활을 사용하는 것은 비겁한 무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오직 중장보병만 전투에 나섰다. 반면 페르시아 군은 약 2만 5,000명의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했고 보병, 궁병, 창병 및 기병까지 고루 갖춘 군대였다.아테네군은 일단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공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페르시아 군은 작전을 바꾸어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1만 병력을 배에 태워 아테네를 향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1만5,000명으로 아테네군 9,600명을 상대하게 했다. 이제 어느정도 병력의 균형이 맞아지자 아테네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담대한 결단을 내린다 최단시간 내에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제압한 후 바로 아테네로 이동해 페리시아 상륙군을 막는다는 것이다.

언덕 위에서 부터 아테네 중장보병은 페르시아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군이 활의 사정거리에 들어올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아테네군이 활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양군의 거리가 200미터 이내로 좁혀지자 페르시아군은 활시위를 당겻다. 그 순간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군사들에게 전속력으로 뛰라고 지시했다. 페르시아 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모두 아테네군의 머리 위로 날아가벼려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거리가 좁혀진 틈을 아테네군이 파고들어가면서 처절한 백병전이 시작되었고 페르시아군은 철저히 유린당하게 된다. 물론 페르시아 군에도 사카족이라고 하는 도끼를 사용하는 우수한 전사집단이 있었지만 아테네 중장보병들에겐 중과부족이었다.

아테네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단 192명이었고 페르시아 군의 전사자는 무려 6,400명에 달했다. 그나마 나머지도 크게 부상당하거나 전투 불능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테네군을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서둘러 아테네로 회군해야 했다. 약 30킬로미터의 거리를 3시간 만에 주파해야 했다. 동시에 아테네 앞바다에 도착한 페르시아 상륙군들은 이미 아테네에 도착한 중장보병들의 위용에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하면서 1차 페르시아전쟁은 아테네의 승리로 끝난다.

페르시아제국은 다리우스 1세에서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로 왕권이 바뀌면서 다시 한번 그리스로 출정하게 된다. 1차 침공 실패 이후 10년 만에 페르시아는 2차 침공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할 야심으로 육군과 해군을 총출동시키는데 그리스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트 해협에 부교를 건설하고 군대와 물자를 수송했다.그리스는 코린트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마라톤 전투의 영웅이었던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래스가 페르시아 군이 그리스 본토에 상륙하기 전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해군 양성을 주장하였으나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해군양성에 모두 반대하면서 그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테네 인근 광산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그 수익금으로 아네테 해군을 양성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해상으로도 침공을 했지만 육상으로도 침공을 병행하였으므로 육상은 우리가 영화 300에서 보았듯이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을 중심으로 한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이 페르시아 육군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키게 된다.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100만 대군을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사흘동안 테르모필레 전투로 진격을 막게 되고 결국 모두 전사하자. 이를 계기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된다.

육지에서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고, 전력의 손실이 있었지만, 페르시아는 계속 그리스 본토를 점령하면서 아테네까지 점령하게 된다. 육지에서의 전투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테네는 모든 시민들을 섬으로 피난시키고 이제 마지막 희망인 아테네 해군으로 페르시아 해군과 일전을 겨루게 된다.

살라미스 전투는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 도시 국가의 동맹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었다.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함대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더 큰 페르시아 함대를 물리쳤다.

그 전투는 아테네 근처의 본토와 살라미스 섬 사이의 해안에서 일어났다. 그리스 함대보다 많은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대가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좁은 해협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지휘관들에게 페르시아 선박이 불리한 해협에서 싸우도록 설득했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을 물리치기 위해 충돌과 탑승을 포함한 전술의 조합을 사용했다. 페르시아 선박은 또한 좁은 바다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이는 그들이 기동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살라미스에서의 그리스의 승리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큰 차질이었고 페르시아 전쟁의 끝의 시작을 표시했다.

그리스의 승리가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를 정복하는 것을 막았고, 서구 문명의 발전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전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곳의 지리와 물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아테네 해군은 3단 노선의 빠른 속도와 더불어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루게 된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일격을 얻어맞은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보급로 및 페르시아로의 육상 퇴각로가 차단될까 두려워 자신의 부하에게 잔존 병력의 지휘권을 남긴 채 도주하다시피 달아나면서 실질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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