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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도세자의 죽음

by 아키텍트류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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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아니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비극의 역사입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1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되었고 불과 두 살 남짓 때 세자로 책봉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앞으로 조선을 다스릴 훌륭한 군왕으로 충분한 자질을 지녔던 세자(이선)는 거의 확실한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을 다스릴 왕재였다. 그러나 왕세자 교육을 시작한 후 세자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면서 학문보다는 무예나 그림과 같은 잡기에 탐닉 하게 된다.

이런 세자를 영조는 탐탁하게 보지 않았고 세자의 나이 15세 때 왕의 업무를 대신 맡아 국정을 대리로 운영하는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인 영조와 세자는 극심한 갈등이 시작됩니다.

세자가 국정을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감당이 되지 못해 아버지인 영조에게 의견을 물으면 영조는 화를 내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처리를 못하고 아버지에게 의존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느냐며 신하들이 있는 앞에서도 세자를 윽박지르곤 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천한 신분에서 왕이 된 만큼 평생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했었고 그런 자기 관리가 철저한 영조에게 세자의 모습은 유약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자에게 점점 실망하게 되고 이런 부자간의 갈등과 괴리는 점점 세자가 아버지인 영조를 두려워하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계증", 큰 소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뇌벽증", 옷차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의대증"이란 정신분열 증상마저 보이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을 따르는 내시나 궁녀 등을 고문하고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궁녀나 기생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등 그 악행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세자의 행동과 반역죄까지 겉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영조는 분노하게 되고 결국 세자에게 스스로 자결하라고 명하게 된다. 그러나 세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끝까지 무고함을 주장하게 되자 역사에서는 이때의 사건을 "임오화변"이라 하여 작은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세자"라 이름을 내리게 됩니다. 영조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분석해보면, 영조의 아버지는 숙종(장희빈의 남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희빈과 무수리 최 씨가 숙종의 후궁 있고 영조는 무수리 최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향후 숙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장희빈의 아들 이윤(경종)은 몸이 약했고 후사 마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소론"은 항상 왕의 건강과 후사가 없음을 걱정했고 반대파였던 "노론"은 영조와 결탁하여 후사가 없고 몸이 약했던 경종에게 영조를 대리 청정하도록 간언 합니다.

평소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경종을 위해 영조는 "감""간장게장"을 진상하게 되는데 경종이 이 음식을 먹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영조는 자신을 왕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노론의 영향력에서 손쉽게 벗어나기는 힘든 상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도세자가 더 완벽한 임금이 될 것을 어려서부터 강하게 훈육하였고 이를 받아들일 수없었던 사도세자는 더욱 심한 갈등과 결국 정신분열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또한 사도세자에게는 "혜경궁 홍씨"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고 그녀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를 너무 일찍 책봉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고 이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를 단절시킨 비극의 시작이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영조와 아버지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세자 사이의 대화의 단절이 의심과 갈등을 증폭시켰고 결국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소통과 대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시대를 초월해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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