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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에우메네스, 디아도코이전쟁 [북리뷰#10]

by 아키텍트류 2019.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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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점점 반항의 기운이생기면서 결국 아테네를 중심으로 알렉산더가 없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알렉산더가 없는 마케도니아는 순간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지지만, 제2인자에 해당하는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본토의 반란세력인 아테네를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혼란을 잠재우지만, 이것은 다가올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후계자 지목이 명확하게 이루어 지지 않아서 그 혼란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알렉산더 시신 탈취사건이라는 시대의 사기극까지 발생하게 된다. 알렉산더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만큼 알렉산더 사후에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처절한 노력의 반증이기도 하였다.

한편, 알렉산더 사후의 마케도니아 왕국에는 알렉산더와 록산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4세와

정신이상증세가 있는 알렉산더의 형인 필리포스 3세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하는것은 알렉산더의 부하장군중 바빌론 지역에서 통치하고 있는 페르디카스 였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맘큼 정통성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의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알렉산더의 어머니였던 올림피아스는 여전히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페르디카스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없었기 때문에 정략적으로 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를 그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이것은 페르디카스 입장에서도 알렉산더대왕의 집안과 혼인을 통해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일이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두명의 왕이 있었지만 알렉산더의 아들인 알렉산더4세는 어머니인 록산나가 정통 마케도니아 출신이 아닌관계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4세의 경우 혼혈에 정통성 문제가 있었고, 알렉산더의 형인 필리포스 3세의 경우 정신이상에 따른 통치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 틈을 이용해서 페르디카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실질적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이고 있었다.

올림피아스의 정적인 안티파트로스도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역시 딸인 니카이아를 페르디카스에게 시집보내서 견제하려고 했다. 비록 니카이아는 클레오파트라와 달리 왕족은 아니었지만, 마케도니아 내부에서 안티파트로스의 영향력이컸기 때문에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로 부터 공격당하는 동안 딸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에게 시집보내서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었다. 페르디카스의 니카이아와 결혼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과정에서 커다란 착오가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안티고노스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답게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페르디카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계획을 알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서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이사실을 알리게 된다.

페르디카스의 행동은 안티파트로스의 분노를 샀고, 이에 앙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와 안티고노스와 함께 페르디카스를 축출하려고 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의 정치적 정적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이끌고 헤레스포토스 해협을 건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대왕의 시신을 운반할 마차를 호송하고 마케도니아로향하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을 안치한 마차는 운반 도중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플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더의 시신을 탈취해서 그가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로 달아난 일이다.

알렉산더의 시신을 잃어버린 페르디카스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지금까지 알렉산더 대왕의 충직한 부하이며 마케도니아 왕국을 보호하고 있던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빼앗기면서 그동안 쌓았던 정치적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을 잃어버린 페르디카스는 안티파트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두명의 적과 싸워야 했다. 

우선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했다. 이유는 대왕의 시신으 되찾기 위함이었고, 두번째는 풍요로운 이집트지방을 점령해서 그 힘으로 안티파트로스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페르디카스는 이작품의 주인공인 "에우메네스"에게 병력을 내주며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를 공격하도록 했다. 

페르디카스는 이와 동시에 정치적으로 올림피아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사르디스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병력을 이끌고 기습하려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겨우 목숨을 건지며 탈출하게 된다. 또한 안티파트로스까지 에우메네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에우메네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에우메네스의 군대조직 내부에는 그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유는 그가 마케도니아 출신이 아닌 아테네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페르디카스의 동생인 알케타스는 에우메네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또한 많은 장군들이 에우메네스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계략을 짜기도 했었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가 그들의 편에 선다면 사면시켜줄것을 약속하고 더불어 새로운 군대와 권력도 보장하겠다고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그런 말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신뢰할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에우메네스는 결국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향해서 네오프톨레모스와 전투를 벌인다. 전투 결과 네오프톨레모스는 소수의 살아남은 기병을 이끌고 간신히 도망친다. 

크라테로스는 네오프톨레모스와 합류해서 에우메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한다. 전쟁터에 도착한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에우메네스를 배신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누구와 싸울는지 병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같은 마케도니아군끼리 싸운다는 사실을 알면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결국 자신한테까지 배신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에우메네스가 지휘하는 군대는 크라테로스 군대와 격돌 끝에 이겼다. 이과정에서 크라테로스까지 전사하게 된다. 또한 에우메네스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맞붙었지만 네오프톨레모스 역시 전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크라테로스의 죽음이 에우메네스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문제거리가 되었다. 에우메네스는 아테네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죽은 크라테로스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게 된다. 나아가 병사들의 분노와 미움까지 사게 된다. 그런데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를 죽이고 승리한 사실을 몰랐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나일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강을 건너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매복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는 반격해서 페르디카스 군대를 괴멸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자 페르디카스는 점점 프틀레마이오스에게 힘에서 밀리게 된다. 결국 자신의 부하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이렇게 알렉산더대왕의 친위대장 출신이었던 페르디카스는 허무하게 죽게된것이다. 이에 따라 에우메네스 역시 고립되게 된다. 이에 따라 에우메네스는 리카오니아의 산악요새인 노라에 고립된채 오랜기간 버티게 된다. 그러나 결국 안티파트로스가 죽자 폴리페르콘이 섭정이 되면서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등과 연합하여 폴리페르콘에 맞섰다.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의 지원을 받아 포의를 벗어나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는 티그리스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해서 알렉산더대왕의 친위 부대였던 은방패부대와 함께 군대를 정비하게된다. 그리고 안티고노스와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전투중 에우메네스는 후방에 있던 보급부대를 잃게 되고, 은방패부대의 배신에 의해 결국 죽게된다.

능력이 출중했지만,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주위 동료들로 부터 항상 의심과 질투의 대상이었던 에우메네스의 삶은 정말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주어진 환경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지략과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위기상황을 잘 헤쳐나갔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비참하게 보일 뿐이다. 알렉산더라는 거다란 영웅의 그림자에 묻힌 위대한 영웅의 죽음과 역사의 기록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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