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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공화정 로마시대 최대 갑부 크라수스[북리뷰#11]

by 아키텍트류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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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시대와 오늘날이 조금 다른 부분은 로마시대는 정치가와 군인이 동일시 되는 개념이 강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군사독재정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로마시대는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군사경험을 갖고 정치를 하는것이 훨씬 통치에 유리했고, 일반 시민들도 이것을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나라를 위해서 군대경험을 쌓는것 역시 명예로운 행위라고 받아들여졌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개념으로 군사독재정권이라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크라수스는 로마 공화정시대에 군인겸 정치가였습니다. 이 당시 정치적으로는 마리우스파와 술라파로 분리되고 내부적으로 내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다른 국가들도 로마의 내전에 따른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틈타서 로마에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로마는 내부적, 외부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인 젊은 크라수스는 이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97년경 전직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로 동맹시 전쟁에서 참가해서 형제를 잃게 되고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기간에도 아버지와 다른 형제를 잃게 됩니다. 또한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서 술라파를 모두 숙청할 때 크라수스는 지금의 스페인(히스파니아)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84년 경에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술라파에 합세합니다. 술라가 로마로 다시 돌아왔을 때 크라수스는 술라의 충실한 동반자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로마로 복귀한 크라수스는 지금까지 잃어 버렸던 자신의 재산을 복구하는데 노력합니다. 술라가 마리우스파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 갔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라수스는 숙청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헐값에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고 심지어 고의로 화재를 일으켜서 헐값에 부동산을 빼앗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재일가는 부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평판이 좋지 못했습니다. 당시 명예롭게 군사적 탁월성을 발휘해서 로마시민들의 영웅이었던 폼페이우스에 비해 돈은 많지만 군사적 업적이 별로 없었던 크라수스는 상대적으로 폼페이우스에게 질투심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로마의 최대 명예직인 집정관 자리에 오르기에는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에 비해서 턱없이 인기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마침 스파트타쿠스 노예의 반란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중 한명이었던 루쿨루스는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으로 소아시아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의 우두머리인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으로 스페인지역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에 대해서 집정관 2명이 진압하도록 했지만 모두 스파트타쿠스에 의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자 크라수스는 8개 로마 군단을 조직해서 스파르타쿠스를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크라수스는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해 부하들을 강압적으로 지휘하면서 나쁜 평판을 받게 되고 내부적으로도 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됩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경쟁구도는 아시아에서 해적을 토벌하는 폼페이우스에 비해, 크라수스는 감찰관이 되어서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서 로마에 그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만들어 갑니다. 이 때 젊은 카이사르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그와 인연을 만들어 나갑니다.

카이사르는 점점 사이가 악화되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중재하고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합니다. 크라수스는 계속해서 폼페이우스를 견제했고, 그들 사이는 점점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카이사르,크라수스,폼페이우스 세사람은 서로 협력하기도 했지만 각각 이익을 챙기기도 하면서 기원전  55년경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두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임기 이후에는 시리아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파르티아와 로마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려는 야망에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에 무리수를 쓰게 됩니다.

유프라테스강 건너 적진으로 너무 깊숙히 진격한 크라수스의 군대는 후방 보급로가 파르티아에의해 차단되면서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겨우 살아서 도망친 로마군사는 총 4만명중에서 약1만명 밖에 안될 정도로 패배는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또한 크라수스의 아들은 전투중 전사했고 크라수스 자신도 파르티아의 계략에 빠져서 결국 죽게됩니다. 로마 최고의 갑부였던 크라수스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모략과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헛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돈으로 이룰 수 있었던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2,000년전이나 오늘날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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