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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헤로도토스 역사 / 최초의 역사책

by 아키텍트류 2019.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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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천병희 선생의 그리스원전 번역본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신화에서 역사로, 허구에서 사실로, 동양의 사마천 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서 역사서를 기술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역사의 주된 내용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터키 서해안 지역에 해당하는 이오니아지역은 그리스 본토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계 도시 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리는 세력은 페르시아 였고 페르시아는 키루스왕을 시작으로 캄비세스,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를 거치면서 급속히 영토를 넓혀 갔습니다.
이 곳에서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계 도시와 페르시아는 항상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쟁의 원인이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가 배후 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페르시아는 해군을 이용해서 아테네를 침략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페르시아 해군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전력을 재 정비한 페르시아는 2차 침략을 그리스 본토인 마라톤 지방으로 감행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밀티아데스,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하는 그리군에게 패배하면서 2번째 침략도 실패하게 됩니다.

선왕인 다리우스왕이 사망한 뒤 크세르크세스왕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3번째 그리스 침략에 나서게 되는데 거대한 배 다리를 만들어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너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본토로 전진하자 크고 작은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하나 둘씩 페르시아 쪽에 붙게 됩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일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안전을 도모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힘을 모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힘을 모아 연합군을 구성한 뒤, 전투에 능한 스파르타가 자연스럽게 지휘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육군은 테르모필라이를 사수하기로 결정하고 레오니다스왕이 이끄는 스파르타 정예 300명과 이를 지원하는 타 도시국가 출신 육군 6,000명이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보병 대군을 저지한 전투가 여기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틀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내부 배신으로 말미암아 우회로를 통한 공격에 스파르타군은 결국 이곳에서 대부분 전사하게 됩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 이후 페르시아 육군은 그리스 중부로 진격하고, 해군은 뱃길로 그리스 본토로 향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바다가 전쟁터가 됩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모두 배에 태워 살라미스 섬으로 대피시키고 마지막 희망인 강력한 해군으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려 합니다.
한편,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 지방을 점령하고 아테네를 잿더미로 만듭니다.
살라미스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 연합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은 피할 수없는 해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해군을 좁은 해협으로 유인한 뒤 기동성을 발휘하여 페르시아 해군을 귀멸시기는 세계 4대 해전 중에 하나로 역사에 남게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크게 패배한 크세르크세스왕은 크게 당황한 나머지 살아남은 함대와 함께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본국으로 패주하게 되고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남은 육군병력을 줘서 그리스 연합군과 끝까지 싸울것을 명하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잔존 부대와 맞서서 플라타이아이 지방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마르도니우스 장군은 전사하면서 기나긴 페르시아간의 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은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제국과 약소 도시국가와의 전투로 약자가 강자를 이긴 기적 같은 전투로 의미를 부여할 수있습니다.
당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한 사건은 이후 서구 문명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미쳤습니다. 만약 그리스 본토가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됐다면 아테네는 강성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면 기원전 5세기의 문화적,지적,예술적 풍요를 일궈낸 아테네의 정신적 각성은 분명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헤로도토스는 당시 그리스계 도시였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기원전 485년경 태어 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록 작업을 그리스어로 "히스토리아"라 불렀고 과거 사건들에 대한 "탐구"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사"라는 개념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한참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용어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는 진정한 역사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는 가장 흥미진진하면서도 지적 가르침을 많이 주는 책 가운데 하나를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2,500년이나 지난 이후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책을 읽을 수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의미

헤로도토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했었고 그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전쟁이 시작된 지역을 찾악 보기도 하고 조사하며 연구해서 탄생한 책이 이 책 "역사"입니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그가 직접 각 지역을 찾아다니며 현지 사람들과 만나고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지리, 풍속, 역사, 전해지는 이야기 등이 재미있게 실려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세계사를 연구하는데 무척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헤로도토스가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일을 시간 순서데로 나열한 것에 불과했지만, 헤로도토스는 이후 역사는 역사가가 과거의 일에 대해 깊은 생각과 연구한 내용을 적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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