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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플라톤 "국가" [Republic plato]

by 아키텍트류 2019.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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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99 소크라테스가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거의 예수의 순교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무식하고 잔혹한 국가에 맞서 영웅적 자기희생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초기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비교적 훌륭하게 여기며 높게 평가했습니다. 다만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너무 일찍 이세상을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을 뿐입니다.이후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순교자이자, 대담한 사상가 및 언론에 대한 자유를 대변하는 인물로 마치 예수처럼 부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철학자, 사회운동가, 예술가 등 매우 많았습니다. 예를들면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또한 그러했고, 프랑스 화가 자크 다비드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지금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아마도 어리석은 군중이 지배하는 최악의 형태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죽음은 간단히 애도하고 끝낼 일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그의 죽음은 지금도 어떤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옵니다.
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은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를 처형하게 되었는가? 민주주의 체제가 실제로 일흔살의 노인을 죽인 것인가? 


사실 소크라테스는 누구한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그저 아테네 일대를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행인들과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였을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치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시급히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을까? 자유가 점점 더 위협받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상황에서도 이런 질문들은 특히 심도 있는 토론을 요하는 문제입니다.
철학의 원류로 간주되는 소크라테스가 일체의 저술을 남기지 않고, 공개 강의도 하지 않았으며, 그어떤 학원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사의입니다. 그는 BC 470년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크산티페라는 아내가 있었고, 아들 삼형제를 두었습다. 그는 장사를 하지도 않았고, 돈 버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습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화를 나누고 사색을 하는 데 보냈습다.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뒤따르기도 했습다. 그가 기소를 당한 것은 BC 399년으로 혐의는 아테네가 숭배하는 신들을 존경하고 경배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신들을 끌여들이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부유한 친구들이 힘을  써주지 않았다면 처형은 독미나리 즙으로 만든 사약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는 대신 훨씬 험악하게 집행됐을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일반적인 사형 집행 방식은 죄인을 나무판에 가죽 끈으로 묶은 다음 목에 금속으로  만든 테를 씌워 서서히 조임으로써 질식사시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히는 인물의 가장 유명한 저술입니다.  이 책은 오만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섬뜪하고, 우습고, 화가 나고, 아름답고, 영감을 주며, 치명적이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일종의 도전 내지는 도발이라는 점입니다. 생각을 해보라는 도발,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쟁해보자는 것같습니다. 
​ 국가 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도 별로 없다는 사실은 좀 창피한 일입니다. 플라톤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충격을 던지면서 야심찬 논리를 전개해나기기 때문에 읽을거리로서 흥미만점입니다. 국가는 유토피아 문제를 다룬 최초의 텍스트로서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 나 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 의 선구다. 동시에 조지 오웰의 1984 에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에 이르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원조격이 되는 책입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1945년에 발표한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모든 전체주의 국가의 어머니라고 규정했습니다. 조지 그로트는 소크라테스처럼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의 소유자는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결코 존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국가는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을 사형에 처하지 않을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라고 하는 가상의 폴리스를 통치하는 철인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국가란 무었인가?
먼저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Republic은 국가 내지 정부 형태로서의 공화정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가 통치하는 공동체를 일컫는 정치조직 내지는 정치체제 정도를 의미합니다.
거의 모든 플라톤의 저술이 그렇듯이 국가도 대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는 대화가 진행되는 무대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길게 제시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인 글라우콘과 피레우스 항구에서 열리는 축제 구경을 갔다가 미침 구경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부자인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로부터 집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또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도 합류하게 됩니다. 대화는 "정의"의  본질에 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롭지 못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더 쓸모 있고 이득이 많다고 주장합니다.케팔로스는 "정의"가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기본 원칙의 문제라고 주장합니다.그런데 대화가 점점 치열해지고 깊어지자 케팔로스는 토론에서 슬그머니 빠집니다.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란 빚진 사람 모두에게 빚을 갚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를 영혼의 상태에 고나계된 좀 더 깊은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잘못을 깨닫게 만듭니다. 트라시마코스는 힘이 곧 정의 라는 식으로 정의를 규정합니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를 채근해 불의한 행동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도 불의는 쓸모가 없다는 주장을 펴달라고 요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그 자체로 쓸모가 있느며, 개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정의"는 결국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도발적인 질문에 대해 대단히 넓고 깊고 야심찬 답변을 제시하려고 시도합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낸 다음 그것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입니다.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핵심 골격만으로 구성된 가상의 공동체를 설정하고 각 구성원이 어떻게 하면 전체(국가)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대화를 통해 각 구성원은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금세 합의됩니다. 하지만 이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해서 해나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구두장이가 맞는 사람은 항상 구두 만드는 일에 전념해야 하고, 의사가 맞는 사람은 항상 의술에 전념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서운 사회입니다. 그런 국가에서는 개인의 욕망이나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농사를 좀 지어볼까 했던 구두장이는 국가에 의해 금지 당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취미 삼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훨씬 더 섬뜩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예컨대 목수가 만성병에 걸려서 목수로서 일을 완수할 수 없다면 그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게 낫다는 애기입니다. 더더욱 기괴한 것은 이 국가에서는 장애인 어린이들은 내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정상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은덕(탁월함)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안전하게 보하하고 지키는 사람은 누구일까? 소크라테스 수호자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수호자들은 지식에 대한 사랑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수호자들은 도시국가에서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 즉 엘리트다. 철인왕과 다른 주민들 사이의 계급 분리는 절대적입니다. 철인왕들은 이런 계급 분리를 나머지 주민들에게 어떤 사람은 영혼에 금이 들어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은, 또 어떤 사람은 청동이나 철이 들어가 있다 는 신화를 주입함으로써 정당화 합니다.
여기서 플라톤은 통치자들이 주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인물이 그런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더 뒤로 가면 수호자들에 대한 얘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놀라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여자들도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통치자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BC4세기 당시에 얼마나 황당하고 도발적으로 느껴졌을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수호자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플라톤에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공정한 국가의 중추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제시하는 교육이론들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교육을 단순히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봤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국가의 교육이론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예술을 공격했기 때문에 악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 끝에 가면 예술에 대한 공격은 더 극심해집니다.
여기서 플라톤이 천착하는 핵심은 시가 미치는 효과입니다. 그는 호메로스의 잘못은 영웅과 신들을 모법으로 묘사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조롱거리, 정서적 파탄자 등으로 묘사했다는 데 있다면서 모방을 공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시 문학의 원리로서의 모방이라기보다는 문학에 들어 있는 직접 인용문이 미치는 영향을 말합니다. 당연히 드라마 일반도 포함하는 얘기입니다. 플라톤의 발상은 배우가 악독한 등장인물 역을 맡으면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는 읽는 문화가 아니라 구전 전통이 강한 문화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합니다. 교육도 호메로스의 위대한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작품을 배우면서 낭송하는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작품은 직접 대화 형식으로 된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흉내 내어 말하는 것은 교약 있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친숙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조용히 읽는 것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큰 소리로 낭송 했을 것입니다. 
국가 끝부분에 가면 예술에 대한 입장이 더욱 비판적으로 변합니다. 앞부분의 교육 관련 논의에서는 모방적인 시문학과 일부 음악만을 배척했는데 뒤에는 회화와 시문학 자체에 대한 개탄을 한참 늘어 놓습니다. 애증이 엇갈리는 비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결국 자신이 가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문학을 완전히 추방해버립니다. 호메로스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키지 않지만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문학을 추방하기 위해 문학적인 수단을 사용ㅇ하는 것은 아이러니 라고 할수있습니다. 국가는 명쾌하면서도 유창한 언어로 대화 형식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아이스킬로스와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말을 많이 인용하고 있고, 생생한 시적 이미지를 구사합니다. 기가 막힌 비유도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몸속에 있는 영혼이 육체와의 교섭으로 인해 오염된 상황을 조가비와 해조류로 뒤덮인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의 몸에 비유합니다. 이상한 것은 국가에는 불쾌한 대목이 아주 많은데도 시를 배척하는 대목이 유독 불쾌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신에 대한 찬가와 훌륭한 인간에 대한 찬미만 허용되는 국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섬뜩한 사회입니다.


*플라톤의 생애

BC427년 아테네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플라톤은 어린 시절부터 유명한 문학가들로부터 교육받고 레슬링과 같은 체력훈련으로 몸을 단련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20세에 소크라테스의 제가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매료되 문학교육보다는 철학교육에 심취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내전 상태에서 아테네 내부에서 민주주의 세력과 귀족정치 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있었으며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정치의 적으로 간주하고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민주정권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정과 귀족정의 적으로 간주하고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는데 플라톤은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을 통해 그의 사상과 당시 정치상황에 대한 깊은 숙고와 비판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철인이 국가를 통치해야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시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통치가가 정치를 해야한다는 사상을 발전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플라톤은 메가라, 시칠리아, 이집트 등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이 정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마흔 살이 지나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라는 학당을 세워 교육에 심취하게 되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갔으나 시라쿠사 참주의 폭정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후 평생 교육에 매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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