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금요일, 잔잔한 가을 아침. 인천에서 출발한 나는 오랜만에 도심의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 도봉산을 찾았다. 오늘의 코스는 송추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 여성봉과 신선대를 거쳐 포대능선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하는 등산코스. 하지만 출발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는 비 예보가 걸렸다. "오후부터 비"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우비와 오버트라우저를 가방 깊숙이 챙겼다. 어떤 날씨든 산이 주는 경험은 특별하다는 믿음으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 내리는 여성봉, 짙은 안개의 곰탕 속을 걷다
송추에서 출발한 도봉산 등산코스는 처음엔 순조로웠다. 산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가을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고, 산길은 고요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등산객도 적어 자연과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봉에 가까워질 무렵, 예상대로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 서둘러 우비를 꺼내 입으며 잠시 멈춰 선다.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 소위 말하는 ‘곰탕’ 속에서 산길은 신비롭고도 낯설었다. 평소라면 여성봉 정상에서 서울 시내까지 한눈에 보이는 멋진 풍경이 펼쳐졌을 텐데, 오늘은 오로지 안개와 비가 나를 반겼다.
비를 맞으며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경험이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 속에서 오로지 내 발소리와 빗소리만 들리는 순간들. 이따금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흩어질 때, 마치 자연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기분마저 들었다. 산길은 젖어 미끄럽고 발걸음 하나하나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오봉 도착, 비바람을 뚫고 나아가다
오봉에 도착할 무렵, 비는 더 거세졌다. 가랑비가 장대비로 바뀌며 등산은 점점 체력과 정신력의 싸움이 되었다. 이때, 가방에서 오버트라우저를 꺼내 입으며 나를 비로부터 더 단단히 무장시켰다. 오봉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장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이날은 그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짙은 안개와 강풍 속에서, 마치 신비로운 존재가 내 시야를 일부러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산이 허락하지 않는 날이구나"라는 생각에 오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욕심을 내려놓고 길을 재촉했다.
젖은 돌과 흙길은 매우 미끄러웠고, 발을 디딜 때마다 긴장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긴장감도 산행의 매력 중 하나다. 산은 늘 새로운 도전을 선사한다. 오늘의 도전은 단순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아니라, 비와 안개, 그리고 나 자신의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함께 산행을 하던 사람들과 눈빛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힘들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연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신선대 등정 포기와 현명한 선택
신선대 근처에 다다랐을 때, 예상보다 강한 바람과 폭우가 몰아쳤다. 신선대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불과 몇 걸음 남짓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하는 것이 위험했다. 산에서는 과감한 포기도 용기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하고, 신선대 등반을 포기한 채 포대능선을 따라 하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산이 허락하지 않는 날에는 산을 존중하는 것이 현명한 법이다.
포대능선에서는 안개 속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붉은 단풍의 시작을 엿볼 수 있었다. 아직 가을이 깊게 내려앉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작은 징후들이 있었다. 붉게 물든 잎 몇 장이 안개 속에서 더 짙은 색감을 자랑하며 산행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계곡길 하산,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살
문제는 하산길이었다. 송추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이 하산로를 덮치기 시작했다. 계단길을 따라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마치 강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져 떠내려갈 위험이 있었기에, 모두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은 언제나 인간보다 크고 위대하니까.
따뜻한 떡만두국 한 그릇, 그리고 산행의 마무리
무사히 하산을 마친 후, 몸도 마음도 녹진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추운 비 속에서의 긴 산행을 끝낸 나와 동행자들은 근처의 방태막국수 음식점을 찾아 떡만두국 한 그릇으로 마무리했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몸속 깊이 스며들며 긴장했던 근육을 풀어주었다. 빗속에서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국물 한 그릇에 피로가 녹아내리고,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었다. 이번 도봉산 산행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에 맞추어 계획을 조정하고, 포기할 때는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를 배운 시간이었다. 맑은 날의 조망만이 산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개와 비 속에서도 산은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봉산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오늘은 비와 안개 속에서 고요한 산의 신비를 만났고, 다음번에는 맑은 하늘 아래 신선대 정상에서 탁 트인 풍경을 만날 날을 기대한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산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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