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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산군 과 장녹수 / (조선시대 최악의 왕과 왕비)

by 아키텍트류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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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왕 "연산군",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1494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연산군" 먼저 그는 어려서 굉장히 불우한 환경을 겪게 됩니다. 바로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 성종은 여자를 상당히 밝히기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폐비 윤씨는 질투심이 굉장히 강한 여자였는데, 그렇게 성종의 후궁들을 싫어하고 모함하곤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어느날 성종이 첩의 방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질투심에 이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랑이를 하던 와중에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유교사상관점으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성종도 분노했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칠거지악을 명분으로 즉, 아내를 내쫒는 이유가 되는 일곱가지 사항 중 1.말이 많으면 쫒아낸다. 2.순종하지 않으면 쫒아낸다. 3.질투하면 쫒아낸다.  이 3가지에 의해 쫒겨나게 되고, 2년뒤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성종은 이 사건을 백년동안 입에도 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 사실을 모른채 재위에 오르게 되고 재위 10년 되는 해에  이 모든 전말을 알게 됩니다. 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됩니다.

옛날에는 우스갯소리로 장 씨 여자가 몇백 년 주기로 나타나 나라를 뒤흔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장녹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인물로 어머니는 천출 출신의 첩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성종의 사촌이었던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고, 시집을 2번 갔던 유부녀에 아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장녹수는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평범한 외모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무를 비롯한 여러 예술 분야에 재주가 있었고 소문이 자자하여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으로 부름 받았고, 품계(벼슬)을 받기도 했으며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항상 함께했습니다. 장녹수는 엄청난 동안으로 30대에도 10대 소녀 같아 보이는 외모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장녹수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연산군"입니다. 조선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성종"의 장남으로 로마의 "네로황제"가 있다면 조선에는 연산군이 있다 할 수 있는 폭군의 아이콘입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었는데, 그녀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정실부인인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다른 후궁들과의 분란, 그리고 1447년 굿하는 방법이 적힌 책 "방양서"와 독극물인 "비상"이 묻은 곶감이 성종에게 발각되면서 퇴출당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간신히 폐출은 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폐위되었으며 2년 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유명한 설중 하나인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을 그었다거나 왕과 식사 도중 국그릇을 뒤집어엎었다고 위에서 먼저 설명했는데, 사실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시대에는 신하나 평민의 집안에도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지존에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은  정말 중증의 분노조절 장애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동이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실 폐비윤씨는 성종의 장남 연산군을 낳았고, 왕비를 폐위 한다는 것은 신하들에게는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굉장히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윤씨를 폐위하는 일에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성종 본인이 앞장서서 나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산군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은 어머니와는 달리 왕좌에 앉았고 재위 초중반 까지는 나름데로 무난한 왕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고 빈민을 구제하는 법을 만들고 왜구를 격퇴하고 3명의 대비를 극진히 모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오사화" 부터 "갑자사화" 를 거치며  폐비윤씨와 관련된 많은 신하를 숙청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까지도 무참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이 시기 이후로 연산군은 거침없이 사치, 향락, 철저한 독재적인 길을 걷게 되고, 이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장녹수는 이런 시기 연산군의 타락에 기름을 부은 인물로 권세를 누리며 뇌물을 받고 온갖 악행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권세를 누린 것은 사실이나 정사에서는 비리나 부정축재, 몇 가지 싸이코적인 일화 말고는 큰 악행이라고 할만한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중매체에서는 연산군을 다룬 사극이 많이 있지만  비극적이고 혼란했던 연산군의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타락이나 폭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에 "장녹수"라는 인물이 더더욱 각색되고 미녀 배우가 역할을 맡고 , 연산군과의 사랑이라든지 2차 적인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데 최적의 소재였기 때문일 겁니다.

장녹수는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몰락하고 반정 세력에 의해 참수되었고 백성들이 던진돌로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픔을 가지고 폭정을 일삼던 왕 연산군의 여자 장녹수. 그녀는 조선의 대표적인 악녀로 꼽히지만, 천출 출신으로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조선을 뒤흔든 대단한 여자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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