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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by 아키텍트류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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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10월12일 오늘날의 서인도 제도라 불리는 곳의 어느 섬에 거대 선박 3척이 도착하게 됩니다. 섬 곳곳에 흩어져 있던 원주민들은 낯선 배가 도착한 것을 보고 해안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두 달이 넘는 항해 기간동안 애가 타게 육지를 원하던 선원들은 드디어 목적지에 닿았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거의 알몸의 원주민들이 몰려드니 긴장하며 경계를 했지만 이내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신처럼 떠받들고 대접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휴식을 취한 선원들은  얼마 후 알몸의 원주민들의 보물을 빼앗고 그들을 때리고 죽이게 됩니다. 1492년 10월 12일. 이날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입니다. 여기서 신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을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 대륙은 신대륙이 아닙니다. 발견자의 입장에서 유럽의 역사관에서 신대륙입니다.

이 아메리카 대륙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밟은 유럽인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노르웨이의 "레이프 에릭손"이 서기 1000년경에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소통하게 됨으로써 상상 이상으로 물질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공을 인정해 미국에서는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영토나 사물에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는데 아메리카에는 콜럼버스의 이름을 딴 지명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다소 엉뚱한데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곳이 신대륙이 아니라 인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던 섬 일대를 "서인도 제도"로 명명했고, 그 곳은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 여기고 그들을 인디오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인디오라는 말은 진짜 인도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말로 바귀었습니다.

문제는 콜럼버스의 착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곳이 인도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대륙발견 이후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아메리카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는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1499년부터 1502년까지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구석구석 탐험합니다.

그는 시간적으로는 콜럼버스보다 늦게 아메리카를 탐험했지만 그 곳이 인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여기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지도제작자 "발트 제뮐러"가 1507년에 세계 지도를 제작할 때 아메리고의 이름을 적어 놓았고, 이때부터 이 대륙이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될 당시의  15세기 유럽 사회는 큰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교황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흑사병이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탓에 봉건영주들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국왕의 권력은 막강해졌습니다. 중앙 집권적 통치 형태가 갖춰지면서 근대적인 영토 국가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럴수록 유럽 각국에서는 영토와 관련된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 중 각 국가들은 자국의 승리를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경제적 기반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농업이 전문화되면서 상업적인 형태의 농업이 발달하고 도시를 기반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초기 자본주의가 등장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자본가들이 세력을 확장했고, 부에 대한 욕구는 눈덩이처럼 커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인들에게 공포를 안겼던 막강한 국가인 오스만제국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당하고 지중해가 사실상 장악당하자 동방과의 교역이 중단되었습니다. 유럽은 오랜 시간 동안 실크로드와 지중해를 통해 동방과 무역을 하고 부를 축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무역로가 막힌 유럽은 거대한 위기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이 당시 동방의 진귀한 물건들과 향신료에 푹 빠져 있던 유럽인들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인들이 주목했던 책이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기술"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동방 무역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원나라로 갔다가 17년동안 중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입니다.

이 책에는 신비로운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은 동방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오스만제국을 피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가를 설득해  그들의 원조를 받아 항해를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1492년 8월 2일 드디어 인도를 향한 역사적인 항해가 시작됩니다. 콜럼버스는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의 팔로스항을 출발합니다. 그는 그 내용을 "항해일지"에 기록했는데 항해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선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원을 격려하고 다독였지만, 항해일지에 "미지의 지역으로 향하는 장기간의 여행이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나의 설명은 그들의 근심을 부분적으로밖에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0월 12일 우여곡절 끝에 결국 현재의 바하마 제도인 산 살바도르 섬에 도착합니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당연히 인도라고 믿었습니다. 이때 사방에서 원주민들이 뛰어나왔고 불을 내뿜는 총을 보자 원주민들은 곧바로 엎드려 경의를 표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이방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라고 생가했던 겁니다.

콜럼버스 일행은 원주민보다 더 환호합니다. 원주민들이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금은보화와 유물을 빼앗아 1493년 3월 스페인으로 귀환합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과 노예로 데려온 원주민들을 마치 전시회처럼 사람들 앞에 선보입니다.

구경꾼들은 저마다 탄성을 부르며 콜럼버스를 개선장군처럼 환대했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대륙으로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게됩니다. 이에 너도나도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동참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2차 항해는 무려 17척의 선박에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다시 출발합니다.

그러나 막상 이들이 도착해보니 식민지화를 위해 그곳에 남겨두었던 선원들이 모두 죽고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자신의 후원자인 이사벨라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고 원주민을 모았습니다. 콜럼버스는 애당초 원주민들을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이 노예, 혹은 이미 지배하에 있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원주민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만행으로 원주민들의 마을은 연달아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악행까지 했지만, 콜럼버스가 얻은 금은보화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게다가 약속한 향신료는 전혀 구하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콜럼버스에게 싸늘한 시선과 비난이 몰아쳤고 그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는 이후로도 몇 번의 항해를 더 거치며 중앙아메리카 파나마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별다른 진척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사 전체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값비싼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던 무역 도시들이 몰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 담배와 감자, 옥수수, 토마토, 고무, 땅콩, 카카오 처럼 중요한 작물들이 들어오는가 하면,  유럽의 식량 부족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시킬수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수많은 유럽인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들에게 신대륙은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인들은 북아메리카로 집중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1700년대 초반에는 이미 30만명이 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이유로 건너온 이들이 많았는데 특히 영국 청교도들의 만행은 정말 악랄했습니다. 이들이 낯선 땅에 처음 정착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 바로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신대륙의 땅 기후에서 잘 자라는 작물들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게 오히려 도왔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원주민들을 사탄의 아들로 규정하고 원주민은 화합해야 할 동반자가 아니라 교화하고 가르쳐야 할 미개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개한 나라에 숭고한 종교 정신을 전파하고 이들을 거듭니게 하기 위해선 폭력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들은 칼과 총으로 그들의 땅을 빼앗고 원주민들의 문명을 해치면서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이렇게 원주민들의 문명은 폭력앞에 무너져 갔고 죽어간 원주민 수는 무려 3천만명이 넘었습니다.

 

현재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각종 인종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대륙의 발견이나 새로운 역사의 시작 등으로 미화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겪었던 가슴 아픈 고통과 역사를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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