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명성황후 와 동학농민운동

by 아키텍트류 2020. 1. 21.
반응형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래보였던 겁니다.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조선은 이미 병들다 못해 썩을대로 썩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명성황후 민비 즉, 민씨 세력이었습니다. 민비와 고종은 청나라에게 빌붙는 "친청정책"을 펼치며 온갖 부정부패를 악랄하게 즐겨 왔는데, 먼저 이미연이 말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즉, 민비께서는 실로 아주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척결한 세도정치를 다시 부활시킨 그녀는 대부분의 주요 관직에 민씨 일가들을 앉도록 했습니다.

몇가지 일화 중 하나는 민씨 세력의 인물 "민형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민비라는 빽을 등에 업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욕심쟁이였던 그는 국고에서 본인 주머니로 치부한 금액이 70만냥이라고 합니다. 당시 국가의 세입은 480만냥이었는데 국가 예산의 7분의 1 수준이였으니 어마 어마한 양이었습니다.

당시엔 민씨라는 성을 가지고만 있어도 아무도 함부로 못했다고 합니다. 민비 본인의 사치 또한 상상을 초월했으니, 갑신정변 직 후 칼에 찔려 죽기 적전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있었습니다. 그를 치료해준 사람이 "알렌"이란 외국인 의사였는데 사례금으로 20만냥을 쾌척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50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녀의 여장부로서의 모습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녀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결혼할 때 민비는 축의금으로 100만냥을 쾌척했습니다. 국고 세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상상을 초월한 액수였습니다.

미신에 빠져있던 민비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는 것을 즐겨 했는데 국고의 10분의 1가량을 시원하게 날려먹습니다.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놓은 국고를 단 1년 만에 써버리는 기적의 클라스를 보여줬던 민비였습니다. 도데체 이런 돈은 어디서 나왔나 조사해 보니  바로 백성들을 수탈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주요 관직에 오른 민씨 일가들은 벼슬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진짜 부패가 상상을 초월했는데 관직을 사서 지방으로 내려가면 얼마 안돼서 돈을 더 바친 사람에게 관직을 뺏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관직에 있는 사람은 민씨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더 괴롭히고 수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씨가 집권을 한 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큰 사건이 터져버리게 됩니다.

당시 조선 말기엔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만민 평등 사상인 "동학"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패한 탐관오리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일본의 쌀 수탈과 상업침해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94년 전라도 고부지역에 부패한 탐관오리 한 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조병갑" 그는 고부에서 군수로 재직 중에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를 징수하고 부유한 농민을 잡아들인 다음 갖가지 죄명을 씌워 2만여냥의 재물을 빼앗고, 자신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여냥을 거두었습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저수지였던 "만석보"를 만들도록 농민들에게 명령했는데 돈도 제대로 주지도 않고 심지어 이 저수지를 사용할 때 말도 안되는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참다 못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농민들은 그렇게 녹두장군 "정붕준"을 선두로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저수지 만석보를 파괴하고 관아를 점령하여 착취당한 세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고부의 신임 군수를 임명하여 농민들을 타일러 스스로 해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서 민란관련자들을 심하게 탄압하게됩니다. 여기서 사단이 나기 시작합니다.

말로는 도저히 안된다는 걸 깨달은 녹두장군 전봉준은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어 무장된 농민들과 함께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 농민군들이였지만 조정의 관군들을 이겨버립니다. 이는 정부가 이 농민들을 제압할 능력도 제대로된 군인들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조선은 아무 힘이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동학농민군들은 밀고올라와 "전주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는 조선의 곡창지대를 장악한 것이기에 아주 엄청난 큰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신분철페, 토지개혁, 조세개혁, 사람답게 사는 것, 단지 그것만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놀란 정부는 민중들을 달래주고 민중들의 불만과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귀를 귀우이기는 커녕 국모 민비는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기득권층에게 있어서 이 농민들이 고통을 받아야  자신들이 잘 먹고 잘 살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원하는 사람답게 사는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갑신정변때 청과 일본이 맺었던 "텐진조약"을 구실로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사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정부는 뭔가 잘못됐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들에게 화해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전주 화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농민들은 해산했지만, 일본은 조선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절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게 됩니다. 조선의 공식요청으로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들어와서 그렇게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의 승기는 일본이 잡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일본은 조선 내정간섭에 앞서 개혁을 실시하는데, 신분제 폐지, 재혼하는 과부, 과거제 폐지 등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그들의 악랄한 숨은 의도가 있었지만, 이는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이 바란 요구들이 이루어진 것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그들이 바로 동학농민군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들은 아무리 민비 즉, 민씨 세력의 목을 따고 싶더라도 조선의 외세세력이 침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요구를 일본한테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들은 개혁이 아닌 일본과의 항쟁을 목적으로 다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명성황후 민비는 본인의 목숨을 걱정해서 일본과 손을 잡고 동학농민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정세는 동학농민군 VS 조선관군 및 일본군의 연합군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들은 잔혹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녹도장군 전봉준은 잡히게 됩니다.

그가 죽기 전 왜 난을 일으켰냐는 물음에 그는 말했습니다.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1894년 갑오년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났기에 아주 중요한 해였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했기에 반봉건적, 반외세를 외치며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꿈꾼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농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 대규모 민중 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한 승리를 하게 되고 1894년 갑오년은 끝내 일본의 조선을 향한 야망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어버립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