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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8 민주화 운동 (잊어서는 안될 사건)

by 아키텍트류 2020.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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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한국 현대사의 꼭 잊어서는 안될 사건,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역사는 물처럼 이어진다고 하죠 사건이 생긴데는 앞선 사건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박정희 서거후 최규하 국무총리는 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게됩니다. 박정희 총격사건의 수사부장으로 전두환과 정승화가 자리를 맡게됩니다. 10.26사건으로 최고 실권자리는 공석이되고 남은 최고 권력자중 최상위 두명. 그중 전두환은 군내 비밀 조직인 하나회 멤버로써 육사 11기 출신이 주력으로 만든 사조직입니다.

하나회 멤버들이 군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국군보안사령사로 모든 정보가 집중되게 됩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 전두환이었고, 당연히 남은 세력이 전두환에 집결되게 됩니다. 사실상 합법적으로 모든 통제가 전두환에게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사결과를 편집하고 반대세력이자 상관이던 정승화를 내쫒고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것이 12.12 군사사태 입니다. 권력야욕이 없던 최규하는 사실상 권한행사가 없었고 이듬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각 대학의 학생회 개편 등이 이뤄집니다.

길었던 유신독재의 끝에 평화로운 날의 연속이었고, 이를 두고 서울의 봄이라 부릅니다. 지금처럼 정보가 발달하기 전이라 군사사태를 3월이 지나서야 알게 된 학생들은 5월 15일 대학생 10만명이 모여 "계엄철페"를 외치면 서울 중심지로 모입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고려대 총학생 회장 신계륜, 서울대 복학생 대표 이해찬, 서울대 총학생회 의장 유시민,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 서울대 복학생 김부겸, 경희대 법대 복학생 문재인 등을 주축으로 서울에서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이 시위는 급격하게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이때 김대중은 학생들의 시위자제를 호소할 정도로 신군부 투입의 우려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심재철의 해산 발표로 대규모 시위대는 하루아침에 해산하게 됩니다.

이때의 결정이 서울역 회군, 유혈사태를 막은 옳은 결정이였다기 보다 전두환의 장기집권을 막을 유일한 기회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10년 늦춘 결정이라 평가받습니다. 역사는 계속된다고 합니다. 회군을 결정한 심재철과 반대한 유시민은 현재도 학생 운동 당시 상황을 두고 진실공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시위를 관망하던 전두환은 서울역 회군을 시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후 전두환은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합니다. 그리고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26명을 연행하는 등 자신의 세력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체포, 강금하기에 이릅니다.

평상시와 같이 시위를 진행중이던 광주에 계엄령이 확대된 5월18일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위대가 공수부대에 돌을 투척하자 폭발한 공수부대가 학생을 구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금남로로 이동한 시위대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포하며 해산을 시도합니다. 일말의 소동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날 오후 제7공수여단이 투입되며 그날의 사건은 시작됩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계엄군의 총칼에 무고한 시민 165명이 숨지고 3천명이 넘는 시민들이 다친 광주에서의 오월은 시작됩니다. 시민들이 휴일의 여유를 즐길 무렵인 오전 10시 전남대는 분위기가 심각했습니다. 학교를 장악한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돌을 던지는 투석전이 벌어지고 계엄군은 곤봉을 휘둘렀고 도주하는 학생들을 2인 1조가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들였습니다.

또한 채포하는 과정이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공격적인 진압에 놀란 학생들과 시민들은 비상시에 도청으로 모이자는 약속에 따라 금남로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길을 막아선 계엄군의 진압방식은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전국에 공수부대를 보냈지만 유독 광주에만 병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시위대의 규모가 많지 않았지만, 7공수, 11공수, 3공수등 계속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결국 사단 병력 전체인 5천 명의 공수부대 인원을 광주에 증파시켰고 항쟁의 마지막 날에는 2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인구 73만에 불과한 광주시에 배치됩니다.

시위대 뿐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시민부터 행인에 이르기까지 살상이 시작됩니다. 무력진압으로 빨리 사그라들길 원했을 신구부였지만 이날의 진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들 까지 시위에 참여하며 규모가 훨씬 증가됐기 때문입니다.

20일에 이르러서는 20만명으로 추정되는 택시와 버스등이 계엄굼의 진로를 차단하며 시위를 지지하게 됩니다. 해외 언론이 없던 지방의 위치적 약점을 이용해서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신군부는 철저히 사건을 외곡시킵니다.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지역 방송국을 방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때의 상황을 잘 그려낸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해외기자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20일 자정을 기점으로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시작됩니다. 전남도지사는 공수부대 철수를 발표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4인 1조의 공수부대는 고층 빌딩에 배치되며 조준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합니다. 

이런 폭력 진압에도 광주 시민은 움츠러들지 않았는데 21일 스스로를 지키기 위새 무기고를 열고 무장을 시작합니다. 이에 계엄군은 잠시 퇴각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남도청을 시민군이 된 시위대가 점령하게 됩니다. 광주 사태라 명명하며 통제된 언론을 이용해 폭도와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알리기 이릅니다.

폭도의 난동이라 표현한 것과 달리 계엄군이 물러난 몇일간 약탈 및 사건은 전무했습니다. 시민 자치 기간동안 공무원이 정상 출근할 정도로 정상적인 행정이 이어지는데 이 기간을 두고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때 무기를 반납하며 평화시위와 무력시위의 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무장으로 집결됩니다. 평화도 잠시 27일 새벽, 2만5천의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을 시작, 탱크를 앞세워 광주로 집결합니다. 전남 도청에 무려 1만여발을 사격하고 끝까지 항전하던 시민군까지 사살하면 진압을 마무리합니다.

신군부는 언론부를 편성하고 100만건 이상을 조종 감독을 통해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기에 이릅니다. 약200명의 사망 및 행방불명자, 4,300명의 피해자를 남긴 그날의 무력 진압은 국민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약 3천명에 달하는 연행되어 고문당한 피해자들은 55.8%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있고, 그중 10.4%는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전두환 정권은 진압 이후에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되어 많은 무고한 이를 처벌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그와 관련한 관련자의 처벌은 아직까지도 미비한 실정입니다. 분명 가해자가 있지만 가해자는 잘 살고 있고, 피해자만 남아있는 현실입니다.

 

무장 진압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지 못한채 한계를 들어내기도 했지만 큰 권력앞에 굴하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위대함을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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