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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자호란 (무능함의 끝판왕 인조)

by 아키텍트류 202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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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선조와 함께 무능한 왕의 끝판왕 인조 시대의 병자호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인해 몰아내고 즉위한 왕인데 광해군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살펴 전쟁을 피하고자 중립 외교정책을 시행했던 왕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의 환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과 조선의 국력을 절실하게 느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중립외교 정책은  그 효과를 보고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인조가 등극하게 되자 조선은 변화된 외교정책을 씁니다.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의 원칙에 충실하고 있었죠. 이 당시의 후금은 기울어져 가는 명과는 달리 확실한 동아시아의 패자로 떠오르던 강국이었습니다. 분위기 파악이 안되는 조선은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 조선에서도 사신을 보내게 되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머리를 조아리는데 청 황제를 만난 조선의 사신들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며 꼿꼿하게 버팁니다.

홍타이지는  "사신은 죽이지 않겠다."  반성한다면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라는 국서를 조선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조선을 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오히려 전쟁을 하자는 주전파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청에 대한 강경파들이 오히려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들은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조선으로 들어왔고 전쟁 발발 열흘 만에 평안도, 황해도를 점령하게 됩니다. 인조는 역시 강화도로 피난하게 됩니다. 당시 후금은 떠오르던 태양 같은 국가로 사실 많은 병력이 아닌 3만의 병력을 조선에 투입했고 이는 조선을 멸망시키려던 것이 아니라 중원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 후방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의 공격이었습니다.

후금은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곧장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합니다. 화친의 조건은 물론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던 조선의 관료들과 신하들은 절대 불가를 외칩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절대 불가한 일이라며 오히려 인조를 압박합니다.

후금은 명과의 전쟁 중 후방을 단단히 하자는 목적이 우선이었으므로 우선 조선과 어느 정도 타협을 보려고 합니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맺고 조선과 명의 국교를 단절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으로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조는 국가의 위기상황에서도 화친 조약을 위해 온 후금의 사신을 오랑캐라며 샛길로 들어오게 하고 푸대접을 하는가 하면 후금의 제안에 대한 답서에 명의 연호까지 찍어서 돌려보냅니다.

이는 빨리 상황을 종결시키려는 후금을 오히려 자극하게 되고 후금은 화가나 명의 연호 대신 후금의 연호를 쓰지 않으면 화친할 수 없다고 통보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던 후금은 명나라와 후금의 연호를 둘 다 쓰지 않는 것으로 화친의 타협을 봅니다.

"정묘화약"의 조건은 조선은 명나라와 단교하지 않아도 좋고 서로 형제 관계를 맺으며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조선왕의 동생을 후금에 인질로 보낸 후 매년 사신을 교류하고 무역을 진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인조는 이 볼모를 보내는 것도 원창군을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후금에 보내게 되고 회맹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오랑캐국과 회맹했다며 많은 신하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지 9년여가 지난 1636년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가 죽고 후금에서 조문단을 보내옵니다. 조선은 이들을 오랑캐라며 또다시 푸대접을 하게 되는데  빈전이 좁다며 금천교 위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제를 올리게 시킵니다. 이런 대접에 화가 난 조문단은  후금으로 바로 돌아가고 돌아가는 조문단에 사람들이 오랑캐라며 돌팔매질까지 했다고 합니다.

1636년 결국 홍타이지는 결국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이번에는 10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게 되고 전쟁 5일 만에 도성이 함락됩니다. 결국 인조를 비롯한 대신들은 남한산성에 고립되고 백성들만 모진 고생을 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인조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조는 또다시 가짜 동생과 가짜 대신들을 보내게 됩니다. 가짜로 보낸 대신은 자신들이 가짜라며 밝히게 되는데 이때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조선에 도착하게 되고 이를 들은 홍타이지는 마지막 최후통첩을 인조에게 하게 됩니다. 다른 조건 필요없이 무조건 인조가 기어나와 직접 항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함락 직전 기어나와 항복의 의식을 하게 됩니다. 인조는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형제의 관계에서 이제는 군신의 관계가 됩니다. 조선의 세자와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며 이제는 청을 상국으로 섬기게 됩니다.

이 지배층의 무능함과 한심함으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선조의 무능함과 오판으로 나라 전체가 망할뻔한 임진왜란에 이어 피할 수 있었던 정묘호란과 조선의 사대주의와 오만으로 인한 병자호란까지 터짐으로서 조선의 백성들은 온갖 징집과 노역으로 고통받고 전쟁에 나가 전사하고 포로가 되는가 하면 적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병자호란 후는 "환향녀"가 사회적 문제가 되는데 환향녀란 청으로 끌려간 조선 여성 중 난이 끝난 뒤 돈을 주고 데려온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대략 50만명 정도가 끌려갔는데 이 숫자는 6.25전쟁 때의 전쟁 미망인 숫자와 비슷합니다. 

석달을 걸어 심양까지 도착한 조선인 포로는 십만명 정도였고, 가는 도중 청군에게 맞아 죽고, 강간 당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강에 뛰어들어 죽은 이가 열에 여덟이었다고 한다.

1637년 조선 정부가 속환사를 심양에  보내 데려온 사람도 600명 정도, 속환하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으니 귀국한 여성 대부분이 사대부와 부잣집의 아내나 딸이었다. 이중에는 인조반정 공신 김류의 딸도 있었다.

몸을 더렵혀 정절을 잃었드면 스스로 족어야지 멀건히 살아 돌아왔다는 비아냥 속에 손가락질을 받았고, 곧 이 들은 이혼 당해 쫒겨나거나 시댁이 눈총 속에 숨죽이며 살았다. 처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절로 들어갔다. 사대부 집안에선 그런 여자를 집에 두면 가문이 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조의 항복 후 조선의 선비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조선아래서는 벼슬을 하기 싫다면 은거하는 척화파 등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역사에서 보듯이 일렇게 무능하고 한심한 지배층을 만나게 되면 피지배층인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강대한 상대를 보고도 끝까지 명분에만 집착하는 조선의 신하들과 수많은 굴욕을 당하고도 끝까지 사대의 명분을 놓지 않다가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며 자국을 비난하는 선비들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는지 이런 엄청난 환란들을 겪고도 어떻게 태연하게 매번 다시 돌아와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 현시대의 우리의 민족성을 보았을 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현시대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된 집권층을 만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시민들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역사는 조선의 무능함과 선조, 인조 투톱으로 이어지는 왕의 오만함 그리고 사대에 집착하는 당시의 시대상과 그 결말의 대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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