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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전쟁

by 아키텍트류 202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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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은 그리 북부 산악지대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태어났고, 아테네의 저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비지 필리포스 왕은 아테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대부분을 점령하며 마케도니아 영토를 확장했다.

선왕인 필립포스의 이런 결실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그 짧은 기간동안 그 당시 전 세계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와 이집트, 인도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석굴암에서 불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 중국을 거쳐 당시 신라까지 불상 제작기술이 전파된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문화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아래 동영상은 이런 관점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리더쉽과 헬레니즘 문화 전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분은 한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https://tv.naver.com/v/10604500

 

[북리뷰#4]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 5분만에 이해해보자

건축사시험 공부방 |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편 및 시오노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3편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tv.naver.com

알렉산더 대왕은 늘 자신의 행동을 적을 많은 기록관들을 자신과 함께하도록 했으며 그의 곁에는 그를 신과 같이 따르는 훌륭한 부하장수 들이 늘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오늘날 중국과 미국을 합친 면적에 해당할 만큼 광활한 영토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에 어떻게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해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면 알렉산더 대왕이 이끌던 최강의 군대  바로 팔랑크스 입니다. 팔랑크스는 6M가 넘는 길이의 긴 창을 든 병사들을 밀집시킨 군대 대형으로 당시에는 최강의 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알렉산더가 운용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고안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팔랑크스는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포스2세가 고안한 겁니다. 필립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 군주였습니다.

필립포스2세는 군사력은 곧 국력이다. 군사력에 국력을 총 집결해야한다. 라며 주장하며 마케도니아를 순식간에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최강의 나라로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되자 필립포스는 원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팔랑크스를 앞세운 필립포스는 순식간에 그리스 지역을 평정합니다. 그때 10대였던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그를 매우 존경했고, 이런 아버지가 더욱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기를 희망했습니다.

당시 사춘기의 혈기왕성했던 알렉산더는 부왕 필립포스가 그리스지역을 평정한 후 더이상 동쪽으로 정복전쟁을 하지 않자 내심 불만을 갖게 됩니다. 당시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자신의 족국인 마케도니아, 필립포스가 정복한 그리스,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가 있었는데 페르시아의 동쪽 끝부분까지가 당시 알려진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물론 페르시아의 동남쪽에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세상의 끝인 페르시아의 동쪽 끝까지 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필립포스2세가 그리스에서 정복을 만족하고 멈추자 알렉산더는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자신이 아버지의 전쟁에 나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면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립포스는 알렉산더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게 되는데 이때 알렉산더는 처음 출정한 전투에서 팔랑크스를 잘 운영해서 놀랄만한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20살이 된 알렉산더는 그간 전쟁터에서 쌓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뛰어난 지휘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간 페르시아 원정을 반대했던 필립포스왕도 결국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딸의 결혼잔치에 참가했던 필립포스왕은 암살자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 아직까지 알수 없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암살의 배후였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암살의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필립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이 되자 알렉산더는 부왕 필리보포스를 죽인 것은 배후에 페르시아가 있다고 주장하며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버지의 원수를 갑는 것이라고 모두에게 설득합니다. 그 소식은 페르시아 본토까지 들어가고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게됩니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알렉산더가 데리고 간 병력은  약5만 남짓에 불과했고, 페르시아는 약 30만 정도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당연히 압도적 군사의 우위에 자만해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지 않고 그리스 출신 용병대장 멤논에게 페르시아군의 지휘를 맞겨서 알렉산더와 전투를 치루도록 합니다.

페르시아군을 지휘하는 멤논은 알렉산더의 팔랑크스를 얕보고 그라니코스라는 강에서 첫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알렉산더의 팔랑크스 대형은 이때 처음으로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팔랑크스를 이처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철저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첫전투에서 알렉산더의 팔랑크스에게 패배한 페르시아는 괴멸되고, 승리한 알렉산더의 군대는  지금의 터키지방을 거의 다 점령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이번에는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알렉산더와 승부를 내기로 결심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팔랑크스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다리우스왕은 기병을 사용해서 팔랑크스의 약점이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약1만5천이나 되는 기병을 활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반해 알렉산더 대왕의 기병은 5천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왕의 전투가 시작된 곳은 이수스 지역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기병은 알렉산더의 팔랑크스를 격파시키기 위해 출동하는데 숫적으로 부족한 알렉산더의 기병은 삼각형 모양의 진을 짜서 마치 쇄기처럼 다리우스왕을 향해 돌진하게 됩니다. 

직접 선두대열에서 기병을 지휘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마치 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목숨이 마치 몇개라도 되듯이 용감히 선두에서 싸우는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에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적같이 적의 대열을 끊어내고 마침내 다리우스왕을 직접 공격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 하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순간 자신의 기병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렸는지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에게 공격해 오는 모습을 보자 그만 부하들을 뒤로 하고 줄행랑을 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3만의 병력으로 10만이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수스 전투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알렉산더는 계속 해안가 도시들을 점령하게 되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승리 소식을 전해 들은 도시들은 싸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는 사태가 속속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명성이 점점 올라가게 되고 알렉산더는 계속 남하해서 지금의 이집트 지역까지 손쉽게 점령하게 됩니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알렉산더 대왕은 다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를 잡기 위해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방에 해당하는 그라니코스 강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결국 알렉산더는 또 다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되고 패주한  다리우스왕은 또다시 줄행랑을 쳤지만, 그의 부하들에게 배신 당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을 거의 대부분 정복한 알렉산더는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지역 정복을 위해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게 되고 결국, 지금 인도의 서쪾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지역은 포로스 왕이 다스리는 곳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 인도군은 강가를 사이에 두고 장기전을 펼치는 양상이 됩니다. 결국 알렉산더는 자신과 같은 옷을 입힌 부하를 시켜서 그곳에서 지휘하고 있는 듯이 속임수를 쓰고 자신은 캄캄한 밤에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강 하류로 내려가서 몰래 도강해서 인도군을 측면에서 압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도의 포로스 왕 역시 강력한 군대와 특히 코끼리를 이용한 전술을 이용해서 대응하지만 결국 측면 공격과 정면 공격을 실시한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시대에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는 더 넓은 세계를 정복하고 싶어 했지만, 부하들의 반대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까지 걸리는 상황이 되자 회군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회군도중 열병에 걸리게 되고, 지나친 음주와 스트레스 그리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었는지 몰라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후계자 선임도 없이 짧고 강렬했던 그의 삶은 끝나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제국은 그의 부하들이 여러 지역을 나눠 통치했고,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수백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정북 전쟁을 통해 차지한 새로운 영토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군대는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접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흡수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출현했고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남동부 지역과 중동 지역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적 배경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스어는 수세기 동안 고대 사회의 공통어로 사용되었고, 신약성경이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쓰여진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지에 남긴 문화적 자극은 그가 현대 사회에 남긴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의 마지막 말로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땐 빈손이란 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네" 페르시아 제국과 이집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많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죽으며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을 때는 모두가 빈 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누구나 오직 빈손, 오직 바람만이 손아귀에서 부딪혔다가 빠져나갈 뿐, 모든 것이 빈손으로 지나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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