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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19혁명 원인과 이승만 대통령의 최후

by 아키텍트류 202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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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를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만 시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혼란의 와중에 1948년 남한 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된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정부 수립후 채 2년이 되기전에 전쟁이 발발해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많은 국민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국가를 제건해야할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전쟁와중에 불법적인 개헌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으며,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부통령에 민주당 장면이 당선되자. 이승만은 민심의 이탈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에서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은 1957년 7월 결국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다.

장기 집권에 대한 음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관건을 총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자유당은 농번기라는 이유를 들어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15일에 실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운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정권 연장 야욕에 세상이 술렁였다. 첫 도화선은 2월 28일 대구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였다. 정부 당국이 야당인 민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등교를 강요하자 학생들은 분노했고,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3월 5일 서울 종로에서의 학생 시위, 3월8일 대전에서의 학생 시위, 3월10일 수원과 충주에서의 학생 시위, 이틀후 부산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오산, 포항, 원주,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 되었다.

드디어 선거일(1960년 3월15일), 사전투표(3인조 또는 9인조) 및 공개 투표에서 자유당은 완장 부대를 동원해 투표소 분위기를 자유당 분위기로 만들며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대리 투표 등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다.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 이었다. 

그러나 투표일 당일 국민의 기본권이 부정선거에 의해 찬탈되는 모습을 바라 본 시민들은 분개했다. 특히 마산 시민들은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그 때 경찰들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시민 8명이 사망하고 수십여명이 부상 당했다. 이것이 바로 "3.15 마산 의거"였다.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3월16일 기자회견을 통해 3.15선거 무효 선언을 했다. 그 날 광주, 진주, 부산, 포항, 서울 등지에서도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발생했다. 그 결과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됐다. 4월6일 서울에서는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열기는 4월9일 부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4월11일 3.15마산 의거 시위 현장에서 사라졌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학생의 주검은 처참했다. 마산시민들은 한 고등학생을 죽이고 이것을 은폐하려고 했던 정권에 대해 분노하며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제2의 마산 의거였다.

 그러자 4월13일 이승만 대통령은 마산 사태등 일련의 정국에 대해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혼란을 만드는 자는 어디서든지 법대로 처리해서 시국을  정돈해야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강경 담화문이였다.

3.15선거이후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학생들의 시위는 4월18일 서울, 부산, 충주에서 일어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될 기미를 보였다. 4월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 약 3천여명이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학생들의 행렬이 시내를 지날때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이 들을 지지했다. 드디어 국회의사당 앞까지 도착한 고려대 학생들은 결의문을 낭독했고, 이후 거리 행진을 시작한다. 종로를 지날쯤 갑작이 100여명의 괴한이 나타나 학생들을 마구 난타한다. 바로 정치 깡패를 동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드디어 4월19일 3.15 정.부통령 선거에 부정을 규탄하고 마산사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시민 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발생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서울대, 동국대, 건국대,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 등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대광고, 동성고 등 고등학생까지 총 궐기했다.

수십만 시위 군중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지금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경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1시20분 학생들은 바로 경무대가 눈 앞에 보이는 마지막 철조망 바리케이트 앞까지 다가갔다. 그 때 경무대 입구를 사수하던 경비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쓰러졌다. 이날 전국의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로 인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언론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 이라고 명명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부통령인 이기붕을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민심은 이미 그를 떠나 있었다. 4월25일 오후,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있었고, 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오후3시 서울 동숭동에 있는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의 대학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쓰여진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했다. 교수들의 시위로 자극을 받은 시민들은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 내라고 소리를 높였다.

4월26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패한 절대 권력이 결국 국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5월19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4 19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공포하고 양원제를 채택하였으며, 헌법에서 기본권에 대한 제약한 조항을 철폐하였고 신문, 정당 등에 등록허가제도 없애고 국가보안법에서 언론 조항등을 삭제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대학교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탄생하는 등 학원 민주화 운동도 전개되었다. 그 해 8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로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 19혁명이후 사회 각개 각층의 민주화 요구는 들끓었다. 3 15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 교원노조 등 노동, 청년, 학생 운동에 활발한 전개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통일운동의 전개 등 우리 사회는 새로운  정의의 길을 제시해 나갔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국민의 열망을 개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결국 군인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로 5 16 군부 쿠데타 였다. 민주주의는 다시 긴 잠에 빠져들게 된다. 

 


*이승만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 초명은 승룡이다.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내어나 3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후 한문을 배우며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중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미국인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주고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우며 이듬해 졸업한다.

일본 칼잡이에의해 민비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사건으로 연루되어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후 개화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서재필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약한다.

1898년 반정부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투옥되어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만에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한후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조선기독교청년협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17년 안창호와 협의하여 뉴역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 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한다.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 그를 따르는 우남파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양상을 보이며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1943년 오스트라아 출신 프란체스카와 결혼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총재를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하고,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한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되면서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창당 및 게엄령 선포등 반대파 국회의원을 탄압하면서 대통령에 재선된다.

1960년 3월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으로 당선되지만, 4.19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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