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기황후 (역사적 사실 중심)

by 아키텍트류 2020. 1. 27.
반응형

기황후의 역사적 사실은 고려 출신 공녀로 원나라로 보내졌다가 중국 원나라 혜종의 황후가 되었으며, 북원 소종의 생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원나라는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운 징기스칸의 후예로 원나라는 지금까지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로 지금으로 치면, 미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14세기 원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우리나라부터 서쪽으로는 지금의 동유럽까지 엄청난 영역이었습니다.

그런 원나라에게 고려는 약40년간 항전하였고, 고려대장경을 만들어 부처님의 힘으로 원나라(당시에는 몽골)의 침략을 막아 내려 했습니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에 여러차례에 걸처침략을 감행하게 되는데  결국 고려는 원나라에 항복하면서 기나긴 고려와 원나라의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고려는 원나라에 금과 인삼 등 수많은 공물과 공녀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나라까지 공녀로 끌려가서 원나라의 황후가 되는 고려출신 공녀가 "기황후"입니다.

그런데, 이 고려출신 공녀인 "기황후"가  어떻게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 자리에 올랐고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으로 원나라를 주물렀을지가 궁금해집니다. 그럼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몽고는 고려를 1231년, 고종18년 때 처음 침입했고, 이후 30년에 걸쳐 무려 7차례나 고려를 공격했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 중동지방으로 무섭게 세력을 뻗어갔지만 항몽의지가 강했던 고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30년에 걸쳐 계속되는 공격으로 결국 고종46년에 항복했고, 그 이후부터 몽고는 고려의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그중 가장 야만적인 원나라의 요구 중 하나는 바로 "공녀"였다. 말 그대로 공물로 바치는 여자 라는 뜻이다. 당시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서 고려여인을 아내로 갖는 것이 마치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고, 개인적으로 공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수많은 공녀들 사이에서 행주 기씨 집안의 막내딸도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고 만다.

앞서 이야기한 원나라를 주물렀던 그 고려여인이 바로 기씨 집안의 막내딸 기황후 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녀로 끌려가면 궁중의 시녀로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거나 더 심한 경우 술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간혹 고려에서의 출신 신분에 따라 왕이나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그들의 처첩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그렇지 못한 일반 양인 출신들의 자녀들의 경우에는 주점에 끌려가서 기생으로서 비극적인 일생을 맞이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기황후 역시 차를 따르는 시중을 드는 궁녀 로 원나라 생활을 시작하는데, 어느 날 궁녀 기씨의 인생에 기회가 생긴다. 원명종의 태자였던 "토곤테무르"가 11세에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왔다. 그 당시 대청도는 원나라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다.

대청도에서 1년을 머물던 토곤테무르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 자리에 올랐고,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혜종"이다. 황제가 된 원혜종은 또 한 번 고려와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차 따르는 궁녀 "기씨"와의 만남이었다. 원사후비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순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기씨를 총애하였고, 당시 제1황후엿던 "타나시리"는 기씨를 매우 질투했다.

또한 야사의 기록에는 타나시리는 질투를 느끼고 기씨를 채찍으로 때리고,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1335년 타나시리 황후의 형제들은 혜종에 대한 모반행위를 일으키고, 황후도 연류되면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혜종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궁녀 기씨를 자신의 황후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2번째로 맞이한 제1황후는 "바얀 후투그"가 되었다. 그녀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검소하고 예의가 바르렀으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낳은 아들은 요절하고 말았다.

새로운 황후를 찾던 중. 궁녀 기씨에게도 황후가 될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기씨가 혜종의 아들을 낳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즈음 원나라 황실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며 황후 책봉에 반대하던 세력을 축출했다. 그렇게 기황후는 1339년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되었다. 이후 25년간 기황후는 제2황후의 자리에 있다가 1365년 제1황후 바얀이 세상을 뜨자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기황후는 제2황후의 자리에 있으면서부터 제1황후를 제치고 30년간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했다. 그녀는 황제였던 혜종과는 정치적 안목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고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기황후는 농민봉기 속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재상과 고위 관료들 중 탁월한 인물을 뽑아 적재적소에 앉혔다.

그리고 그들을 키우는 작업까지 능수능란하게 진행했고, 대규모 구호사업도 벌이며 정치 전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기황후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자기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름은 "휘정원"이었으나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자신을 따르는 고려 환관들을 앉혀 장악했다.

그 덕분에 권력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물적 자원들을 "자정원"에서 지원하면서 기황후가 권력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황후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조국에 긍적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반대이다. 그녀의 권력은 원나라의 속국이던 당시 고려에서도 막강했었고 기씨 가문은 고려 왕실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기씨 가문은 기황후의 권력을 배경으로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등 횡포를 자행하기도 했다. 기황후는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고 기씨 형제와 친원파를 척격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폐위를 시키려고 했다. 기황후는 최유라는 장군에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 침략을 명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막히면서 공민왕 폐위는 실패로 돌아간다.

마약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고려는 "기씨 고려"가 됐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황후는 자신이 공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장악 후에 고려에 독촉해 공녀를 계속 보내라며 지시한 기록도 있다. 원나라의 기황후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정작 고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다. 공녀 출신으로 세계 제국의 황후에 올랐지만,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우이자 중심인물이다.

원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방대했던 원나라는 크게 흔들렸다. 그러던 중 황하유역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기황후와 원혜종은 도피길에 올랐다. 이후 어린 나이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만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