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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차 세계대전 원인 결과

by 아키텍트류 202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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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 사건"때문이다. 1914년 사례예보 사건이 계기가 되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피가 군사훈련에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사라예보 한복판에서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총으로 저격해서 죽임으로써 발생하게된다.

*동영상: 

https://tv.naver.com/v/13322845

 

1차세계대전 원인

건축사시험 공부방 | 1차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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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로 프린치프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의 멤버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통합하길 원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의 피해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황제승계 1순위인 황태자가 죽자 분노했지만, 세르비아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동맹국이자 같은 게르만 민족의 강대국인 독일 제국의 지지도 얻어야 했다. 이런한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 직후 약 한 달의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이때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약속하자 오스트리아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며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한편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를 도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준비했지만, 문제는 독일이 이미 오스트리아에 절대적인 지지를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요구사항 10가지 중 8가지만 수용한다. 그러자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한다. 7월 30일, 러시아는 세르비아 보호를 선언하며 총동원령을 내린다. 같은 날,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은 뱃놀이 떠났던 황제 빌헬름 2세가 급히 복귀하여 똑같이 총동원령을 내리고 8월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한다.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인 프랑스도 어차피 참전할 것으로 판단, 8월3일에 프랑스에도 선전포고 하고 슐리펜 계획을 발동한다. 슐리펜 계획이란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자 양면전선이 형성될 위기에 처한 독일이 서부전선으로 빠르게 병력을 집중하여 7주만에 프랑스를 점령하고, 이후 모든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러시아와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공격을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해야 한다는 점과 병력들을 철도로 수송시킬 세부적인 시간표까지 짜놨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 한번 발동되면 멈추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슐리펜 계획 발동 직후 그 계획을 중지하려 했으나, 이미 병력들이 국경을 넘어버렸기에 계획 중지가 불가능했고, 결국 전쟁은 확대되었다. 8월 4일,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하자 참전을 극히 꺼려하던 영국마저도 독일에 선전포고 하고,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도 독일에 선전포고 한다.

곧이어 영국에게 전함 2척을 사기당한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으로 참전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이탈리아가 영.프.러 연합군의 편으로 참전함에 따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 한 명이 저지른 사건은 전 세계가 휩싸인 끔찍한 대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한편, 벨기에를 빠르게 점령한 독일군은 거침없이 프랑스로 진격한다. 그러나 프랑스 마른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프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게 되어 독일군은 파리를 약50km 남겨놓고 그 진격을 멈추게 된다. 이 마른 전투의 결과로 인해 기동전은 끝이 나고,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7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한다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 독일이 우려했던 양면전선 형성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서부전선과는 반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다. 1916년 2월, 참호전이 고착화된 서부전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프랑스 베르됭 요새레 대규모 공세를 가한다. 수개월동안 계속된 이 베르됭 전투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 양측 합쳐 100만 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1916년 7월, 베르됭 전투로 받은 프랑스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영국군이 솜 지역에서 독일군을 향해 대규모 공세를 가한다. 4개월 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솜 전투의 결과 영.프 연합군은 12km를 전진하게 되었지만, 이 12km를 전진하는 동안 발생한 영.프 연합군의 사상자는 약 60만명에  달했다. 독일군 역시 솜 전투로 인해 약 5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장에 등장한 신무기 기관총의 위력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 현장의 지휘관들이 과거의 전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병사들을 기관총 진지에 돌격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참호를 뚫기 위해 농기계 트랙터를 군용으로 개조한 탱크, 화학무기와 전투기, 폭격기와 같은 신무기들의 등장은 앞으로 전쟁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예고였다. 1916년 6월,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브루실로프 공세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지만, 동맹국 독일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티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성공적인 브루실로프 공세에도 불구하고 1917년 2월,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러시아 본토에서 결국 혁명이 발생하는데,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는 등 러시아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대륙의 멕시코에 전보 한통이 도착한다. "만약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한다면 지원해줄 것이고, 미국에 뺏긴 영토를 찾게 해주겠다." 라는 내용의 전보였다. 멕시코에 이 전보를 보낸 사람은 바로 독일의 외무장관 치머만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분노했다. 그리고 독일이 영국의 해상봉쇄에 맞서 시행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 선박과 미국인이 잇달아 사망하자, 1917년 4월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1917년 4월, 독일은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한 남자를 남몰래 기차에 태워 혼란에 빠진 러시아로 보낸다. 그 남자는 바로 블라드미르 레닌이었다. 1917년 10월, 혼란이 지속되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1917년 11월, 정권을 잡은 레닌은 남몰래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과 정전협정을 체결한다. 이로써 독일은 모든 힘을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18년, 미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한다. 1918년 8월, 미.영.프 연합군이 독일의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진격한다.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항복한다.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항복한다. 같은 시각 독일의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며 제국이 붕괴되었고, 독일이 결국 항복하게 되면서 4년 동안 약 4,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 끔찍한 1차 세계대전은 미래의 위험요소만 잔뜩 머금은 채 끝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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