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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슬람 과 이슬람교의 기원

by 아키텍트류 202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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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년,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있는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문에서 "무함마드" 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을 따라 상인의 길을 걷던 무함마드가 40살이 된 610년, 여느 때처럼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40살의 무함마드에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함마드는 곧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신(알라)의 계시를 받게 된다.

겁에 질렸으나 이내 자신이 예언자임을 깨달은 무함마드는 자신의 부인을 시작으로 이 신생 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한다. 무함마드가 유일신인 알라만을 믿으라고 포교하자 당시 번성한 교역도시로서 여러 신을 믿는 "다신교"가 유행했던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쫒아내버린다.

622년, 쫒겨난 무함마드가 북쪽의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를 "헤지라(이주)" 라고 부르며 이 해가 바로 이슬람력의 원년이 된다. 이윽고 메디나에 정착한 무함마드는 역경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이끈 뒤 자신을 쫓아냈던 메카의 세력을 격파한다.

얼마 안가 무함마드가 메카인들의 반격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이슬람교는 급속도로 확산 중이었고, 이를 통해 무함마드는 곧 메카인들과 화해를 하고 630년에 메카에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이후 활발한 선교 및 정복활동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상당수를 다스리게 된 무함마드는 632년, 메디나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무함마드가 죽고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겼으나 주도권을 잡은 메디나 세력이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최측근인 아부 바크르를 새로운 지도자(칼리프, 할리파)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틈을 타 여러 부족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알라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맹활약과 꾸준한 정복활동으로 이슬람 제국은 "사산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급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656년, 높은 세금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을 살해하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는데, 이때 알리의 칼리프 선출에 불복한 세력들이 봉기하여 이슬람 제국은 결국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내전 도중 칼리프인 알리가 반란군에 질질 끌려다니자 분노한 신하가 알리를 암살하였고,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칼리프 직위를 넘겨받으면서 661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하게 된다.

이리하여 즉위한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은 뒤 칼리프를 선출로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에게 칼리프 직위를 물려주면서 "칼리프 세습제"를 확립한다. 한편, 알리와 무아위야의 내전 당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시아파)이 따로 분리되어 기존의 이슬람 세력(수니파)과 오늘날까지도 갈등하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5대 칼리프인 아브드 알 말리크 이후부터 활발한 정복활동을 재개하여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8세기 초에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정복하며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기세를 타고 더 북진하다가 프랑크 왕국에 패배(투르 푸아티에 전투)하여 유럽 정복이 종료된 이슬람 제국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차별을 가한 결과, 곧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반란을 주도한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의 후손으로 우마이야의 군대를 격파한 뒤 칼리프 마르완 2세를 몰아내고 750년에 새 칼리프(압바스 왕조)로 즉위하게 된다. 이때 겨우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족 압드 알 라흐만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 우마이야 왕조의 명맥을 이어갔다.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새 압바스 왕조 하의 이슬람 제국은 기존에 있던 비 아랍계 무슬림 차별을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무슬림들을 평등하게 대했다. 역시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압바스 왕조는 동쪽의 당나라와 싸움(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8세기 말에 즉위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치세에 이르러서는 문화 부흥까지 이루어져 제국에 황금기가 도래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로 인해 온갖 문물들이 유입된 바그다드는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고, 유럽에서 건너온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들이 번역되어 이슬람 문화는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하지만, 9세기 중반에 용병으로 고용된 유목민 튀르크계 군인(맘루크)들이 칼리프 친위대의 자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고, 909년에는 시아파 세력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을 앞세우며 북아프리카에 독자적인 나라(파티마 왕조)를 건국했다. 결국 이슬람 세계는 동쪽의 압바스 왕조와 서쪽의 파티마 왕조로 분열되고 만다.

이후 계속된 시아파의 공격에 시달린 압바스 왕조는 11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목민 튀르크족이 세운 나라 "셀주크 제국"에게 수도 바그다드를 빼앗겨버렸고 이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셀주크의 지도자에게 "술탄"의 칭호를 부여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된 셀주크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하고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를 포로로 잡자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1095년,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유럽의 기독교 연합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독교 왕국들을 세우지만, 12세기 후반에 서쪽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한 "살라딘"이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 원정은 뜸해졌으나 13세기 초중반에 머나먼 동쪽에서 갑자기 몽골군이 나타나 중동지역을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1258년, 명맥을 이어오던 압바스 왕조도 몽골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하였고, 한때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던 바그다드는 몽골군에게 짓밟혀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몽골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일 칸국"이라는 몽골인들의 나라가 생겨나는데 이들도 곧 내분에 휩싸여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한편, 셀주크 제국의 몰락으로 여러 소국들이 난립한 아나톨리아 반도(오늘날 터키)에 튀르크족의 오스만이 1299년에 세운 오스만 제국이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점차 성장, 1453년 마침내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며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윽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오스만 제국은 과거 몽골군의 침입을 막았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함과 동시에 동쪽의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를 격파하며 이슬람 세력의 맹주가 되었고, 16세기 초반에 술탄으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 치세에는 정복과 문화 부흥이 동시에 이루어져 오스만 제국은 황금기가 도래함과 동시에 전 유럽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빈을 두 차례나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두 번의 공격 모두 실패하였고 내부에서는 술탄의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져 이들이 술탄을 마음대로 교체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이러는 사이 유럽국가들에게 뒤처져버린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초반에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게 되는데, 이를 보고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한 술탄 압둘마지트 1세가 1839년에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한 "탄지마트 개혁"을 실시한다. 하지만 이후 크림 전쟁과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탈탈 털린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영토들을 거의 상실했고, 새로이 발칸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열강들이 충돌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게 구입하기로 한 전함을 영국이 양도하지 않자 영국의 반대편인 독일의 편으로 참전, 1918년에 패전국이 되어 결국 영토가 산산조각 나게 된다. 그 이후 그리스군의 침공까지 받은 오스만 제국은 영웅 아타튀르크가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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