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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하멜 표류기 (13년간 조선 체류기)

by 아키텍트류 2020.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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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6월18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박이었던 스페르베르호는 자카르타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포루투갈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쫒겨난 이후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교류를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최신 학문과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일본도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선박 스페르베르호는 북쪽으로 항해하던 도중 강력한 태풍을 만나게 됩니다. 파도에 떠밀린 스페르베르호는 결국 암초에 좌초되었고 64명의 선원중 선장 레이니어 에흐버츠를 포함한 28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다행히 배가 침몰하기 직전 육지를 발견한 덕분에 해변으로 헤엄쳐간 36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중 한명이 이후 하멜 표류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23살의 청년 헨드릭 하멜이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표류한 곳이 일본이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일등항해사가 위치를 관측한 결과 그 곳은 제주도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습니다.

이틀동안 이들은 천막을 짓고 떠내려온 식량을 찾으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표류한지 3일만에 약1천명에서 2천명의 병사들이 몰려와 이들을 둘러쌓습니다. 얼마후 지휘관 앞에 끌려간 네덜란드인들은 지휘관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서로 아무말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지휘관은 이들이 며칠간 굶은것을 알고 첫끼에 탈이 날것을 염려하여 흰죽을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쌀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답으로 은잔에 포도주를 따라 대접했는데 포도주를 취할때까지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지휘관들은 그뒤로 네덜란드인들을 친절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하멜 일행은 이틀간 말을 타고 이동해 제주 목사 이원진앞으로 끌려갔는데 역시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주 목사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광해군이 유배되서 머물던 좋은 집을 이들에게 내주었고, 일행이 머물고 있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물으며 최대한 배려해주었습니다.

이원진은 자주 네덜란드인들을 불러 조선말을 가르친 덕분에 조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이원진은 이들을 위해 잔치를 배풀면서 국왕의 답장이 오면 네덜란드인들이 원하는대로 일본으로 보내줄 수 있을거라고 위로해 줍니다.

 

하멜일행도 이원진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방관은 무척 현명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드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그들이 보여 준 따뜻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제주도에 표류한지 2달이 지나 네덜란드인들에게 반가운 손님 한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25년전 이들과 마찮가지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물을 구하려고 제주도에 상륙했다 생포되었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를 일본으로 보내려했지만 일본에서는 그가 기독교도 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갈곳이 없어진 벨테브레이는 결국 조선에 완전히 귀화하게 되었고 "박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습니다.

박연은 훈련도감에 근무하면서 대포를 개량하는 일을 맡았고 조선인 아내와 결혼해 자식까지 가졌다고 합니다. 박연외에도 함께 사로잡힌 네덜란드 동료 2명이 더 있었는데 이들은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박연은 백인의 얼굴에 길고 붉은 수염을 하고 있었지만 이원진 목사가 그를 조선인으로 소개할 만큼 조선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습니다.

 

하멜은 박연이 57~58살 정도로 보였으며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한달정도 하멜일행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자 다시 네덜란드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박연을 통해 비로소 그들이 이섬에 표류하게된 사연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박연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왕과 관리들에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청원했지만 왕은 항상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당신을 보호하고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도 박연처럼 고국에 돌아가지 못할까봐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멜일행에게 친절했었던 이원진 목사는 임기가 끝나 떠났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자 이들의 삶은 궁핍해졌습니다. 식량이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고 외출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한 선원들 몇명이 배를 훔쳐 바다로 향했지만 돛대가 쓰러지고 배안으로 물이 가득 차오르자 탈출을 포기하고 다시 해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끌려온 이들에게 목사가 왜 도망치려했는지 묻자 이들은 "여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낳을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벌로 각각 곤장 25대씩을 맞았는데 이때문에 한달을 꼬박 누워서 지냈습니다. 1654년 5월 이들을 서울로 데려오라는 국왕이 명령에 따라 이들은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전주와 공주를 거쳐 10일을 여행한 이들은 서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조선의 임금이었던 효종을 만나게 됩니다.

효종은 청태종앞에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알려진 인조의 차남이었습니다. 병자호란때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는데 이때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 또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었습니다. 인조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청나라에게 호의적이었던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가 오랜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을 때도 아들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에 돌아온 뒤 2달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가 죽었을 때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독살을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죽은 소현세자 대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효종이었습니다.

효종은 죽은 형과는 다르게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몰래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고 박연의 도움으로 대포를 개량했었던 성과가 있었던 만큼 표류한 하멜 일행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며 간청했지만 효종은 곁에 있던 박연을 통해 외국인을 나라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효종은 실망한 이들에게 장기자랑을 시켰고 박연의 지휘를 받아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다행히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이들을 잘 대해줬지만 한양에 머무는 동안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호기심을 느낀 대신들이 계속 불러대고 구경꾼들도 항상 몰려들어 이들은 편히 쉴수 없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 외국인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되었기에 하멜 일행은 남한 산성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겨울이 되자 추위로 많은 고생을 했는데 땔감을 얻기위해 20km가 넘는 산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1655년 3월 핸드릭 얀스와 핸드릭 얀스 보스가 네덜란드 복장을 하고 청나라 사신이 지나는 길에 숨어있다가 뛰쳐나오는 돌발 행동을 벌였습니다. 곧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고 청나라 사신이 이들을 대려가 여러가지를 질문했지만 조선조정에서는 이 사실이 청나라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기위해 사신에게 뇌물을 줘서 사건을 매듭짓습니다.

조선입장에서는 청나라 북벌을 몰래 준비하던 사실이 탄로날 수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의 존재를 숨겨야만 했습니다. 한편 사고를 낸 네덜란드인들을 바라보는 조정의 시선은 고을리 없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얀스와 보스는 결국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고 조정에서는 남은 네덜란드 선원들을 어떻게 처분할 지 며칠간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대신들은 후한을 없애기위해 이들을 죽이자고 했고 어떤이는 네덜란드인에게 무기를 줘서 죽을때까지 서로 싸우게 하자는 무시무시한 제안을 했습니다. 하멜은 조선의 형벌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큰 죄는 반역죄인데 이런 죄를 저지른 경우 그 일가친척이 모두 처형된다. 남편을 죽인 부인은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길가에 어깨까지 땅에 묻는다. 옆에는 톱이 놓여 있는데 지나는 사람은 톱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한 번씩 톱질을 한다. 반면 남편이 부인을 죽였을 때 그 이유가 정당하다면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발바닥을 수차레 맞은 뒤 그가 저지른 범행과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다. 도둑질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발바닥을 맞는다."

 

하멜 일행은 불안해 하면서 박연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물었는데 박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목숨이 사흘 동안 더 붙어 있다면 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오." 다행히 네덜란드인들을 불쌍히 여긴 효종 덕분에 이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하멜 일행은 전라도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인자하고 착한 관리 밑에서는 그럭저럭 편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배려심 없는 관리 밑에서는 음식과 옷조차 제공 받지 못해 먼곳까지 구걸하러 다녀야 했고 때마침 이어진 흉년덕분에 굶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멜은 1661년에서 1663년까지 계속된 흉년으로 수천명의 백성들이 굶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깥 세상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껴 하멜 일행을 따뜻하게 대접해준 조선인들이 아니었다면 이들 또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멜은 자신이 만난 조선인들의 세계관과 국민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 세상에 12개의 국가나 왕국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들은 한때 모두 중국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우리가 많은 나라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들은 모두 우리를 비웃으며 그런 것들은 어느 도시나 마을의 이름일 뿐이라고 답했다. 조선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기를 잘 한다.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혀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거리로 여긴다. 조선 사람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잘 믿는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그들을 속일 수 있다. 또 그들은 외국 사람을 좋아하며 잘 따른다. 특히 승려들이 그렇다. 그들은 마치 여자처럼 마음이 여리다. 조선 사람들은 자살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자살한 사람을 가엾게 여긴다. 그래서 과거 청나라에서 쳐들어왔을 때 많은 병사들이 싸우다 죽기보다는 숲 속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1666년 7월 새로운 관리가 부임해 네덜란드인들에게 온갖 부역을 시키자 노예 같은 삶에 지친 하멜 일행은 탈출을 감행했고 그들은 조선인에게서 산 배 한척을 타고 며칠을 항해한 끝에 제주도에 표류한지 13년 만에 조선을 탈출해 일본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네덜란드인들의 환영을 받은 하멜 일행은 다음과 같은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13년 28일 동안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 하느님께 어찌 감사의 마음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멜 일행은 그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13년 동안 조선에서 겪은 일을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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