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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차 세계대전 원인 대공황

by 아키텍트류 2020.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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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공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1929년 발생한 대공황에 대해서 살펴보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경제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동영상: http://tv.naver.com/v/13224852

 

2차세계대전원인

건축사시험 공부방 | 2차세계대전의 원인이었던 세계 대공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음성은 Clova Dubbing으로 제작한 AI 보이스 입니다.

tv.naver.com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으로 잿더미가된 유럽에 투자하며 엄청난 돈을 벌게됩니다. 이렇게 호경기가 계속 되자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는 오르기만하는 주식을 사러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192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공업생산이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식민지에서도 농산물과 원료생산이 크게 늘었고 자본가들은 발전한 기술덕에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빠르게 늘렸지만, 소비자의 구매력은 그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팔리지 않는 농산물과 원료가 쌓이게 되었고 결국 노동자 농민의 소득이 줄어들게됩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소득이 줄어든 것은 곧 공업분야에서도 이어지게 되어 1925년부터 미국은 건설산업이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공업생산도 제자리걸음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주식은 계속해서 오르기만 해서 전에는 모두 서부에 금광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모두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몰려들게됩니다. 변호사, 의사들은 물론이고 트럭운전사, 간호사, 가정주부까지 모두 주식을 샀습니다. 하지만 1929년 9월에 금융인들의 오찬 모임에서 투자가인 로저 뱁슨이 호경기가 끝날 것이라는 내용의 발언을 해서 주식시장이 약세로 돌아선 후 결국, 1929년 10월24일(검은 목요일) 모든 사람들이 몰려나와 주식을 팔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상점과 공장에는 팔리지 않은 물건이 가득히 쌓이고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돌아다녔습니다. 쉴새없이 돌아가던 기계는 멈춰 있었고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아 헤매게됩니다. 하지만 자본가는 팔리지 않는 물건때문에 공장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에 고용도 늘지 않았습니다.

불경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시작된 주식가격 폭락이 지독한 경제공황을 불러왔습니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뒀던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공황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미국기업들은 유럽의 여러나라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엄청난 흑자를 올렸고 유럽은 이 돈을 갚기 위해 수출을 장려했습니다. 하지만 대공황이 덮치자 미국은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을 줄였고 더 이상 투자도 하지 않게 됩니다. 유럽 국가들도 달러가 없어 미국 상품을 살 수 없게 됩니다.

무역규모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세계경제는 더 깊은 불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932년이 되면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을 묶는 이른바 파운드블록을 형성하여 블록 내에서만 자유무역을 허가하고 다른 나라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여 자신들만 대공황에서 탈출하려 하였는데 달러, 마르크, 프랑 등 다른 화페를 쓰는 제국주의 열강들도 블록을 형성하였고 무역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됩니다.

당연히 국제관계는 험악해졌고 열강들은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 경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국제연맹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국제관계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실업의 절망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휩쓸리기 시작했고 제국주의 정부들은 사회주의혁명 내지는 민족해방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고전 경제학의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는 개인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전체를 번영의 길로 이끈다는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을 관철시켜 당시 미국에서는 신앙과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긴 결과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수정을 가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케인즈"입니다. 현상황의 문제점은 쉽게 말해 생산능력은 큰데 사람들이 돈이 없기 때문에 이를 소비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정부가 대신 나서서 소비를 하라는 것이 그의 처방이었습니다.

즉, 정부가 도로를 닦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지으면 많은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얻고 소득이 생겨 그 돈으로 빵과 옷과 땔감을 사게되며 그들이 지출한 돈은 다시 기업으로 들어가 소비재를 만드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에게 이윤과 임금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부의 재정 지출을 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케인즈 경제학을 제일 먼저 실행한 사람은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전쟁배상금으로 허덕이던 독일국민의 불만을 틈타 위대한 독일제국의 부활이라는 환상을 부추기며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내쫓고 공산주의자를 체포하였으며 노동조합간부, 자유주의 지식인, 신부와 목사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반대의 목소리를 없앴습니다. 이를 전체주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군인과 경찰의 수를 늘리고 경찰서와 교도소를 짓고 군수품 공장을 세우고 도로와 비행장을 닦았습니다. 이렇게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케인즈가 말한 유효수요를 만들었던 겁니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하여 곧 실업자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군수품을 아무리 생산해 봤자 국민생활이 나아질리는 없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자원을 쥐어짜며 버틸 수 있었지만 변변한 식민지가 없었던 독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침략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2차 세계대전입니다.

한편 일본도 비슷한 정책을 펴면서 중국 대륙을 침략함으로써 불황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히틀러와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부가 경제예 개입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자본가들을 뒤로하고 뉴딜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발전소를 세우고 건설붐을 일으켰으며 독점을 규제하고 임금협상에도 간섭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역시 2차 세계대전이 터져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엄청난 돈을 쏟아붓지 않았다면 대공황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경제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대공황의 가장 큰 피해를 본 미국은 연방준비제도라는 중앙은행을 만들어 통화량과 이자율, 물가를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업보험과 의료보험을 확대하여 불경기에도 최소한의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분배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소득격차가 너무 커지면 혁명세력이 발생하고 사회는 불안정해 집니다.

따라서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의무교육제도를 확충하였고 노동조합의 파업을 보장하였습니다. 독점금지법과 공정거래법도 만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은 수정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을 냉전시대라고 합니다.

이상 1920년대와 30년대를 휩쓸었던 대공황과 이로인한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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