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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을지문덕 살수대첩 이야기

by 아키텍트류 2020.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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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은 612년 수나라와 고구려사이에 발생했던 전쟁으로 수나라의 수 양제에 의해 발생한 전쟁이지만 먼저 수 문제와 고구려와 얽힌 악연으로부터 이 전쟁의 불씨는 시작이 됩니다.

중국의 혼란기였던 약 360년간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통일했던 수나라의 건국자였던 수 문제였습니다. 실제 수 문제의 업적은 엄청난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정치조직을 3성6부제로 재편했고 향후 당나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방의 돌궐과 거란을 복속시키고 한반도 남쪽의 신라마저도 수나라에 복속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강성해진 수나라는 변방국가들 대부분을 복속시키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에 저항하게 됩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요하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중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양왕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평강공주의 아버지인 평강왕의 아들입니다.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의 군대와 고구려 군대 약1만명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를 선제공격합니다. 수 문제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수 문제가 30만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1차 침략하게 됩니다.

수 문제의 30만 대군은 요하를 건너기 위해 행군도중 많은 비가 오게되고 늪지대로 변한 요서지역을 행군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이 기회를 놓지치 않고 고구려와 말갈 군대는 게릴라전을 전개해서 수 문제는 고구려 정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폐배하게 됩니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극히 소수만이 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서 어디에도 정확한 폐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패전의 수치스러운 기록을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은폐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양왕은 중국의 위진남북조를 통일했던 수 문제의 30만 대군의 침략을 막아낸것입니다. 수 문제는 고구려를 한번 침략해서 패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는 전쟁으로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 나라의 국력을 더욱 부강하게 만들기위한 내치에 돌입하게 됩니다.

훗날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훗날 수 양제)은 고구려 침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신라의 진평왕은 수 양제에게 걸사표(군대를 구걸하는 내용)를 전합니다. 즉,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후방에서 신라가 협공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든든한 후방지원까지 얻게된 수 양제는 대규모 군대(약100만)를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알려진바로는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한 전쟁이라고 합니다.

100만의 대군이 얼마나 많은 병력인지는 역사적 기록에 의해서 알수있는데 출병기간이 약 40일이 소요되었고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무려 400km에 달할만큼 엄청난 병력이었다고 합니다.

수나라의 100만 대군은 요하를 건너 드디어 고구려의 요동성에서 맞붙게 됩니다. 이때 요동성의 성주는 수나라의 대군을 완벽하게 막아냅니다. 하지만 안탑깝게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막아낸 요동성의 성주 이름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4개월 이상을 수나라 100만 대군이 공성전을 펼쳤지만 성을 점령할 수 없게 되자 수 양제는 우중문에게 30만의 별동대를 동원해서 요동성을 우회해서 직접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합니다.

우중문이 이끄는 30만의 별동대는 평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지만, 행군 도중 계속된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되고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청야작전(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작전)을 통해 이동중인 수나라 군대가 어떠한 보급품과 식량등을 얻지 못하도록 합니다.

보급품이 떨어지고 식량이 부족해진 수나라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지고 전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평양쪽으로 힘들게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산동반도에서 출발한 수나라 수군병력은 대동강 하구로 침입해서 수나라 육군과 협공으로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 수군 장수인 내호아는 직접 공을 세우기 위해 평양성을 수군 병력으로 공격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고건무 장군(훗날 영류왕)은 평양성을 일부러 비워두고 적들이 방심하게 만든 후 숨겨두었던 복병을 활용해서 수나라 수군을 상대로 승리하게됩니다.

수나라 육군은 패배한 수군과 합류하게 되지만 사기가 저하되고 군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에게 시를 한 편 보내게 되는데 이 시가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신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다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결국 우중문은 수나라 군대를 회군해서 수나라로 돌아가던 도중 청천강 일대에서 수나라 병력이 강의 절반 정도 지나갔을 때 뚝을 터트려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승리했고 수나라 병력 중 본국으로 돌아간 병력이 겨우 2천 여명이었다는 우리나라 3대 대첩중에 하나인 살수대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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