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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헤르만 헤세"가 발표한 두 세계의 공존과 대립, 그리고 그 세계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독자의 연령대에 따라 서로 이해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고전문학 작품들은 어린 시절 처음 작품을 읽을 때 깊이 있는 감상을 끌어올리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의 경험이 쌓여가는 시기에 다시 읽는다면 놀라울 정도의 감상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 틀을 벗어납니다. 어린 시절에도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 작품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다른 고전문학과의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작품을 읽는다면 주인공이 소위 사춘기를 거쳐 가는 외적 성장에 주목하겠지만, 성인이 되어 읽었을 때는 멘토들의 가르침을 통한 내적인 성장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겉과 속을 모두 훑어볼 수 있습니다. 즉, 줄거리 소개를 통해서 어린 시절의 관점으로, 감상공유를 통해 성인의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데미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에밀 싱클레어"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딱히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고, 라틴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바르고 옳은 길을 가르치려 하죠. 청결하고 온화하고 질서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답답해하고 일탈을 원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싱클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싱클레어는 이 무렵 불량학생 "프란츠 크로머"를 알게 됩니다. 크로머는 천상 나쁜놈입니다. 멋대로에 거칠고, 예의도 없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며 온실 밖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욕망 실현을 보조해 줄 수 있을 듯한 인물이었죠. 크로머가 살고 있는 온실 밖은 시끄럽고, 음산하고, 폭력적인 곳이었습니다. 결국 싱클레어는 크로머를 따라 온실 밖을 경험하게 되는데, 싱클레어는 강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도둑질도 서슴지 않고 할 줄 아는 거친 사람이라고 인상을 주고 싶은 맘에 크로머에게 "내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 라며 거짓말을 했죠. 그런데 영 어설펏습니다. 지금껏 온실 밖에서 닳고 닳은 크로머는 더 쎈 놈이었죠. "그래? 도둑질을 했다고? 맹세할 수 있어? 그럼 내가 신고 해야겠다." 라며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어요. 크로머는 계속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싱클레어는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다가 크로머에게 줬죠. 거기에 불안과 공포는 덤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상 나쁜 놈인 크로머는 협박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엔 한 술 더 떠서 싱클레어의 누나를 자신에게 데려오라는 말을 합니다. 그 때 싱클레어 앞에 "막스 데미안"이 나타났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의 전학생이고 한 학년 상급생입니다.
바른 모습에 어른들이 참 좋아할 느낌의 데미안은 작품의 문장을 빌리자면 "그는 몸가짐이 마치 농부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같아 보이려고 애쓰는 왕자님" 같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출합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싱클레어는 자신을 구해준 데미안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은 채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싱클레어가 볼 때는 크로머와 패턴이 다를 뿐 데미안이라는 사람도 자신과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고, 일단은 지금껏 흐트러져버린 자신의 삶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얼마 후 두 사람은 다시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내면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 다시 말해 사춘기에 비뚤어지지 않고 바른길을 갈 마음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긍정적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신도 데미안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데미안과 함께하며 내면을 탐구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런나 또 다시 친구를 잘못사귀는 바람에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아무래도 내안에서 크로머가 다시 나타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를 단테의 연인인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짝사랑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는 껄렁껄렁한 모습보다는 바른 모습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둠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바른 모습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 그러놓고 보니 이건 뭐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것이 베아트리체인지 데미안인지 헷갈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싱클레어는 여전히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싱클레어는 새의 그림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데미안의 메시지가 담긴 쪽지가 회신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문장이 적혀있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쪽지를 읽은 싱클레어는 압락사스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싱클레어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멘토, "피스토리우스"가 등장합니다. 싱클레어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깊이 있는 내면을 성장시켜 나가게 되는데, 더불어 그가 궁금해 하던 "압락사스"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압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사탄"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존재인겁니다.
이제 싱클레어는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데미안과 재회했습니다. 동시에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싱클레어 인생의 새로운 멘토 "에바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에바부인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에바부인에게 어울리는 성숙한 청년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더욱 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장으로 가게됩니다. 그렇게 각자의 전장으로 떠난 두 사람은 다시한번 헤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부상을 당한 채 병원 침상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데미안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싱클레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 번 나를 필요로 하겠지. 하지만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난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땐 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해. 그러면 알아 차릴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싱클레어가 눈을 떳을 때 데미안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싱클레어는 더 이상 크로머의 협박에 벌벌 떨던 나약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다져왔던 내면의 성장으로 더욱 단단해진 마치 자신이 동경하던 데미안과 꼭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데미안의 줄거리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스토리가 와 닿을까요? 학교폭력과도 같은 크로머의 괴롭힘, 데미안의 등장, 베아트리체와의 짝사랑. 에바부인과의 사랑.
이 작품은 대표적인 성장소설로 불립니다. 하지만 초반에 설명드린 대로 나이가 들어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내면의 성장에 더욱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예로 성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에 대한 싱클레어의 감정은 그냥 짝사랑이 아닌 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내면의 성장을 이루는 재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인의 시각으로 감상을 해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내면의 성장은 모두 대립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앞선 줄거리의 순서에 따라 가정과 바깥세상이라는 두 개의 세계, 카인과 아벨, 그림 속 베아트리체와 데미안, 새와 알, 압락사스의 선과 악.
이런 구성은 모두 상반된 구성으로 두 가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전하고 따뜻한 가정과 어둡고 위험한 바깥세상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결국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대립과 공존의 구성으로 인해 인간이 내면을 갈고 닦는 데에는 반드시 올바른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닌 옳지 못한 것에 대한 절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그 절제를 통해 내면을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이 작품에 등장했던 네 명의 멘토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을 통해 설명 된 겁니다.
싱클레어는 그렇게 성장 한 겁니다. 작품 초반 코로머의 협박에 못 이겨 아버지의 돈을 훔친 싱클레어.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하면 해석을 하면 좋을까? 정말 비뚤어지고 싶었던 것으로만 볼 순 없을 겁니다. 도둑질을 함으로써 크로머에 대한 겁에 더해 양심의 가책이 싱클레어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시작한겁니다.
벗어나고 싶게 말이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버지의 돈을 훔친 것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자신이 궁금해 하던 온실 밖의 세상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데미안만의 남다른 성경해석 부분이 있습니다. 카인의 표식이라던가,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훌륭한 도덕자 이야기, 그리고 알과 새, 압락사스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직관적인 부분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새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설명할 수 있고, 알은 세계라고 했으니 그 세계를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의지의 대상이 됩니다.
내면이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알을 깨뜨리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니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압락사스가 있습니다. 이 또한 대립과 공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힘들여 알을 깨고 나왔지만 선으로 갈지 알으로 갈지의 선택이 남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습니다. 획일화 되지 않은 다양한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뉘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데미안과 병상에서의 재회와 이별. 싱클레어는 이제 더 이상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내면의 성장을 이룬, 자신이 동경하던 데미안과 하나가 된 압락사스에 다다른 인간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은 대립과 공존이라는 재료를 통해 그리고 있고 마지막에 가서는 압락사스의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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