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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약산 김원봉 (의열단,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과연 영웅인가?

by 아키텍트류 2020.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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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기에 대표적인 투철한 무장투쟁의 독립투사였지만, 훗날 북조선의 붉은 전사가 되는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군 출신으로 가정은 그럭저럭 유복한 부농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어린 나이에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직접 겪었고 일찍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으며 중국 쪽에서 대학에 들어가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들어간 곳도 영문과였다고 합니다. 그는 해외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게되는데 그는 민족적인 해방은 일본과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어야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불과 22세에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잠깐동안 군사학과 군사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에서의 생활은 잠깐이었고 그는 이종암, 이성우, 서상락, 강세우 등 몇몇 동료와 함께 그 유명한 "의열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의열단은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등을 실행하고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를 성공시키는가 하면 1920년대에는 일본의 요인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비밀조직으로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단발적인 이런 항거로는 그들의 궁극적 목표인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김원봉은 이후 정식적인 군대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의열단 외에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대첩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등 주목할만한 군사적 투쟁이 있었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약하는 무장독립 세력들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되고 독립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게 됩니다.

의열단 역시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김원봉은 이후 중국의 황푸군관학교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쑨원의 삼민주의를 관심 있게 접하기도 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도 다양하게 접하게 됩니다.

이곳을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설하게 되는데 당시 중국은 엄청나게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에 이은 국공합작, 또 이후 중국 내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그리고 일본군과의 전쟁까지 이어지며 말 그대로 혼란의 소용돌이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김원봉은 특별히 어느 쪽에 몸을 던지지는 않지만 이 과정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여는가 하면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안효구와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에 분명 젖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는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기도 하는데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혼란에 많은 부대가 공산당에 합류하는 등 이탈이 지속해서 일어나게 되고 김원봉은 이를 막는 데 애를 쓰게 되지만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군대는 크게 줄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해왔고 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자 게속되는 이탈과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로 입장이 모호해진 김원봉은 광복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그동안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배척했었습니다.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단 병력이 필요했던 임시정부는 김원봉을 군무부장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이는 그저 이름뿐이고 별다른 실권은 없었습니다.

이후 드디어 대한민국은 광복이 찾아오고 김원봉 역시 조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늦게 합류한 부분도 있었고 일단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김구는 일생동안 공산주의,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김원봉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김원봉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나타납니다.

해방 후 1946년 2월 김구가 이승만과 국민회의를 만들고 임시정부를 계승할 것을 공표하자 김원봉은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운 이 비상 국민회의가 들어서면 임시정부의 핵심인사이고 대통령과 주석을 역임한 이승만과 김구 중심의 체제가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원봉은 이후 남조선로동당을 주축으로 한 좌파의 연합단체였던 "민족주의 민주전선"에 합류했습니다. 원래 좌파의 성향이 강했던 김원봉으로서는 오히려 어울리는 행보였습니다.

이곳에는 여운형,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었는데 이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핵심 인물들은 훗날 북한에서 고위직들을 맡게 됩니다. 물론 김원봉도 포함됩니다.

해방 후 과정에서 김원봉은 총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했다는 혐의로 1947년 경찰에 체포당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 유명한 악명높은 친일출신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후 1947년에는 남한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미군정이 민족주의 민주전선과 좌파 단체에 대한 탄압과 소탕에 나서자 남로당 박헌영 등의 굵직한 인사들은 북조선으로 피신했고 김원봉이나 남은 좌익인사들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보스 격인 여운형의 사망까지 겹치자 김원봉은 정말로 설 곳이 없었고 본인 역시 위험을 감지하게 됩니다. 결국 김원봉은 1948년 4월9일 월북하게 되는데 그는 거물급 인사답게 나름대로의 대접을 받았고 국가검열상에 오르게 됩니다.

김원봉은 평양에 왔을 때, 옛 동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습니다. 사실 이때의 북한은 통칭 "옌안파"가 큰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옛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박호삼, 한빈, 최창익, 허정숙, 김학철 등 옛 김원봉의 동료였고 독립투사들이었지만 이제는 뻘건 전사들이 된 이들이 었습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에서 분리된 조선의용군 출신자들은 북조선 뻘건 전사들의 핵심이 되었고 이들은 북조선 인민군의 주축이었습니다. 

조선의용군은 해방 후 북조선의 중심인물들이 된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남침 때 동원된 인민군의 주요 전력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가야 합니다. 또 인민군 장성은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바로 이 조선의용군 출신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앞장선 자들이 바로 해방이 되기 전 투철한 독립투사들인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는 점 또 김원봉과 생사고락을 함게했던 자들이 해방후 북한에서 뻘건 전사들이 되었다는 것도 유심히 봐야 합니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가서도 확실하게 이곳에 남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분명히 옛 동료들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김원봉이 월북하고 북한에서 한자리 맡은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족의 비극인 6.25가 발발합니다. 김원봉은 처음엔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반대했다는 설도 있긴 한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일단 그는 전쟁이 벌어지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그는 간첩을 남파하고 훈련하는 일을 도맡기도 했고 북한군의 식량을 생산하는 일도 하게됩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1952년 "미제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에반대하는 조국 해방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며 노력 훈장을 받았고 후에는 노동상에 임명되게 됩니다.

그는 전쟁 이후 많은 이들이 숙청될 때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1958년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사망합니다.

간략하게 김원봉의 생애를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김원봉은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에 그를 언급하면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단, 김원봉이 투철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라는 말은 맞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과 더불어 수면위로 떠오른 김원봉에게 건국훈장을 줘야 한다는 서훈 논란, 또 대통령의 발언처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을 치하하며 나오는 김원봉을 재평가하고 영웅화하는 이런 여론, 이것이 정말로 올바른 현상일까요?

백선엽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를 국군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안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선엽은 독립군을 잡는 간도특설대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6.25전쟁 하나만 보면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과거의 행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 그렇다고 그가 공을 세운 부분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를 국군의 첫 명예 원수로 추대할 움직임을 들은 또 다른 군의 원로인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 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 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도리 거요."

백선엽의 공적 부분을 나름대로 치하하는 것과 그를 대한민국 전체의 영웅으로서 국가가 치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채명신 장군의 뜻은 한마디로 스스로 우리 군의 명예를 더럽히고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을 국군의 첫 원수로 추대해 적에게 책잡힐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김원봉의 공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의 과는 어마어마합니다. 현충일은 독립투사들만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은 절대 일본과 맞서 싸운 것뿐 아니라 뻘건 전사들과 맞서 싸워 자유를 지켜낸 과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현충일에 그 용사들을 죽이고 민족간에 비극을 만든 전쟁에 참여한 조력자를 굳이 언급해 영웅처럼 묘사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대통령이 언급한 조선의용대 출신의 수많은 이들이 인민군이 되어 내려와 현충원에 안장된 그 수많은 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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