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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김재규 장군 평전 줄거리[10.26사태]

by 아키텍트류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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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를 두고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계획범이냐 아니면 우발적인 시해였냐 이렇게 두 가지 논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정의 없는 국가는 강도 떼와 같다"고 했던 것처럼 1972년 유신선포 이후 수많은 학생, 노동자, 문화인,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등이 반유신 운동을 하다 공권력으로 위장된 폭력에 희생당하거나 옥고를 치렀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시해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할 순 없어도 당시 유신정권의 종지부를 찍은 김재규의 거사는 역사적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976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신군부 전두환에게 1980년 5월 24일 사형 지행 당한 김재규 장군 평전 줄거리입니다.

김재규는 당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의협심정의감이 강한 소년으로 성장했지만 학업성적은 우수한 편은 못되었으나 의협심과 정의감만은 강했다고 합니다. 학업성적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유학을 결정하게 되고 어린 김재규는 일본유학을 떠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 역시 만만치 않아서 일본학생들과 싸움이 벌어지면서 그곳에서 적응에 실패하고 2년 만에 조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국내로 귀국한 김재규는 1941년 5년제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은 110명중 100등을 할 정도로 낮은 편이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업엔 소질이 없다고 판단한 김재규는 일본군 특별간부후보생에 지원하게 되는데 그 가 소속된 부대는 52 비행사단으로 카미카제 특공대 훈련부대였습니다. 임관 6개월 전 일본이 패망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다시 조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일본이 조금만 늦게 폐전했더라도 김재규는 아마 카미카제 특공대로 참전해서 반딧불처럼 하늘에서 사라졌을 지 모른다.

조국으로 귀환 후 잠시 교사 생활을 한 뒤 해방 전 조국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조선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입교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때 박정희와 같이 동기생으로 생활합니다. 12주 교육 후 소위로 임관해서 대전 제2연대 중대장 대리 보직으로 주로 정보담당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위로 진급했을 때 당시 연대장이 남로당당원으로 발각되면서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으로 김재규 역시 강제 전역을 당합니다. 강제 전역 후 자신의 모교였던 대륜 중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 시절 향후 10.26 사태의 동지 박선호를 제자로 가르치게 됩니다.

 

김재규의 억울한 전역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는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되는데 그 이후 그의 군생활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1973년 3월 최종 중장 예편하기까지 약 25년 동안 이루어집니다. 군전역 후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 게다가 동향인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군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핵심 요직을 맡게 되는데 여기엔 박정희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말기에 가면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은 차지철과 불화가 심했고 잦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런 차지철을 박정희는 대놓고 감싸기 시작하자 결국 궁정동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순간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암살한 이유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함, 우리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것,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국제적으로 한국이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씻어내고 국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그는 재판과정에서 밝힌다.

그리고 최후 변론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하지만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과 같은 사람들로 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했고 선태긔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으므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부하들에게 극형은 면하게 해 달라"라고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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