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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카이사르 시저 [오늘날 유럽을 만든 알레시아공방전]

by 아키텍트류 201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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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2년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중앙의 알레시아 평야를 무대로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 5만 명과 갈리아 부족들이 연합한 30만 대군 사이에 벌어진 공방전으로 갈리아 전쟁을 결정하는 전투가 되었다.

당시 로마의 북서쪽 국경은 알프스산맥에서 론강 상류의 왼쪽을 따라 피레네산맥까지 또 한쪽으로는 세벤산맥 기슭을 따라 가론강 상류까지였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프랑스 남부 지방 프로빈키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에 대한 원정에 나서게 된다. 게르만 용병 아리오비스투스를 격파하는 것으로 시작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은 이후 8년 동안이나 이어져 이듬해인 기원전 57년 벨기에족을 정복했고, 기원전 56년에는 브르타뉴 남부에서 베르티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곧이어 라인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를 공격했고, 두 번에 걸쳐 도버 해협을 넘어 브리튼섬 정벌에

나서 갈리아 지방의 여러 민족을 로마의 지배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가 이탈리아 북부

에 머무르면서 속주 통치에 전념하던 기원전 52년 겨울, 카르누테스족이 반란을 일으켜 오를레앙의 로마인들을 학살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아르메니의 새로운 족장이 된 젊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맞서 갈리아 부족 전체가 총궐기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호소는 갈리아의 많은 부족의 반향을 끌어냈다. 

반란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곧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을들을

불태워서 로마군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청야 작전을 펼치고 농성을 병행하며 로마군을 괴롭혔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고전하던 카이사르는 마침내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4만 명의 갈리아인들을 학살한다.

기세를 몰아 게르고비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했던 로마군은 성급한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게 된다. 베르킨게토릭슨는 1만 5000의 기병을 투입해 쫒겨 가는 카이사르군을 포위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보병 8만 명으로 로마군을 압박했지만, 오히려 기병대가 격파되는 바람에 양군 모두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서로 군사를 물리게 된다.

전쟁이 길어지면 가뜩이나 옅은 부족장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그해 여름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인의 성지인 알레시아에서 농성하며 갈리아 지방의 모든 부족이 구원하러 오지 않으면 자신들의 운명은 성지와 함께 모두 전멸할 것이라고 전령을 보냈다.

단단한 성벽으로 에워싸인 알레시아를 관찰하던 카이사르는 딜레마에 빠졌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가두기 위해 알레시아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곧이어 도착할 갈리아 지원군들에 의해 로마군이 포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군은 포위망과 방어망을 동시에 구축해야 했다.

9월 말까지 한 달 동안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외곽에 17킬로미터의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주변

고지대의 능선을 따라 21킬로미터의 외곽진지를 건설했다. 이 두개의 방벽 사이 약120미터의 중간 지대에 5만 명의 로마군이 위치해 안팎의 적과 동시에 싸운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2중 포위망이자 방어망이었다. 로마군의 축성기술은 알레시아

공방전에서도 그 빛을 발했다. 참호를 파고 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든 다음, 흙 둔덕 위에 나무 방벽을 만들고, 이 방벽을 따라 망루를 세웠다.

참호 바깥쪽을 따라 함정을 파고 스티몰리라 불리는 나무 끝을 뽀족하게 다듬어 불에 그을려 만든 꼬챙이를 꽂아놓았다. 현대의 지뢰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이 고대 무기들은 이중, 삼중으로 설치되어 로마군의 진지로 공격해 오는 갈리아 전사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그 사이 30일분밖에 없던 식량이 떨어진 알레시아는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로마군에게 자비를 청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어떤 식량도 주지 말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의 냉정한 명령은 결과적으로 전투 기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9월 20일 갈리아의 각지에서 26만 명의 증원군이 몰려왔다. 로마군과 갈리아 증원군의 전투는 기병끼리의 격전으로 시작되었는데,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로마군이 오히려 갈리아 기병을 격파 했고 증원군의 도착에 힘입어 반격에 나섰던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 역시 로마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다시 성안으로 후퇴했다.

다음 날 밤, 야음을 틈타 공성기를 앞세워 공격을 재개하지만, 로마군의 탄탄한 방어력에 막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물러나고 말았다. 두 번의 공격 실패를 하는 동안 갈리아군은 알레시아의 북쪽을 흐르는 강 건너편 언덕에 상대적으로 적은 1만 명의 병력만 배치된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갈리아 증원군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알레시아에 대한 로마군의 압박을 줄임과 동시에 로마군의 포위망 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었다.

사흘째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베라우누스가 지휘하는 6만의 갈리아군은 로마군의 포위 망 중 가장 취약한 북쪽  방벽에 집결, 방패를 나란히 세우고 공격했다. 다른 곳에서도 동시 다발적인 파상적인 총공격을 감행한 결과 포위망 몇 곳이 뚫렸지만 카이사르의 전략과 겹겹이 구성된 로마군의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장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알레시아 북쪽은 기회를 보던 카이사르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뛰어 들었고 배후를 로마 기병대가 급습하여 베르카시베라우누스까지 생포되자 갈리아군은 급속히 와해하여 다시 성안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5만 명의 로마군이 알레시아의 8만 명과 증원군 26만 명을 합쳐 모두 34만

명의 갈리아군을 물리친 것이다. 안팎의 적을 상대로 동시에 싸워 이긴 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

승리였다. 이 승리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깨달았던 사람은 반란을 이끌었던 베르킨게토릭스였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그는 부족회의를 열어 자신의 목을 베든가 카이사르에게 넘겨 다른 사람들을 구명하라고 했다. 무기와 부족장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갈리아군의 항복을 받아들인 카이사르 앞에 베르킨게토릭스가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반란에 참여한 갈리아인들 중 포로가 된 것은 베르킨게토릭스 한 명뿐이었다.

이미 8년에 걸쳐 계속되는 갈리아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은 것은 물론 그때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의 패자에서 벗어나 알프스를 넘어 북쪾에까지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이 공방전의 승리로 유럽 북부까지 로마 세계에 편입시키는 첫걸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카이사르가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전투인데도 전쟁사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후세 역사가들이 표출한

관점의 차이와 유명한 용장과 명장이 등장하지 않았고 탁월한 전략, 전술이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구멍에 둑이 무너지듯 하루 또는 그보다 짧은 시간에 전개된 전투의 승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제국이 무너지고 세계가 열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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