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리뷰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최초의 로마황제

by 아키텍트류 2019. 12. 10.
반응형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200년 넘는 기간 동안 식량의 자급자족 정책을 포기했다. 카르타고한테서 영유권을 양도 받은 시칠리아에서는 높은 생산성을 가진 밀이 재배되어 본국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밀의 경쟁력을 잃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올리브유는 수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질과 양을 확보했지만, 주식인 밀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 확보는 공화정 시대에는 안찰관의 임무였지만 식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경험이 부족한 젊은 계층이 맡는 관직인 '아이딜리스'로는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당한 인물이 임시로 임명되어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는 것이 그당시 관례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기존의 정원이 네 명이었던 안찰관을 여섯 명으로 증원하고, 그 가운데 두 명에게 식량 담당 안찰관(아이딜리스 케레알리스)이라는 직함을 주어 식량 확보를 전담하게 했다.

임무는 밀 수입처 확보, 빈민 계층의 밀 무상 배급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안찰관과 같이 두 안찰관의 임기를 같은 1년으로 제한하면 지속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안찰관이 지속해서 업무를 유지하는 이 제도를 상설화하기로 했다.

기원전 22년 당시 집정관이 자신의 권한이자 임무를 수행하려면 국고에서 임시 비용 지출 승인을 원로원에 요구해야 한다. 600명이나 되는 원로원에서 사안의 시급성을 따지지 않고 떠들어대는 동안 공황 상태에 빠진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독재관에 취임하여 사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위기관리체제의 수장인 독재관은 원로원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사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재산을 털어 사람들을 해외로 급파하여 밀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도 주민을 위기와 공포에서 구해주었다 라고 자신의 업적록에 기록할 만큼 시민들은 감격하면서도 원로원과 같이 많은 사람이 토론을 거듭한 뒤에야 결단을 내리는 공화정 체제의 한계 역시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투스가 노린 바였다.

기원전 28년 다시 닥쳐온 식량 위기 때는 아우구스투스는 식량청 장관이라는 관직을 신설한다. '식량청 장관"은 정치성을 배제한 행정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사 계급의 인물을 임명했다. 이는 황제가 직접 자신의 의지로 임명하는 행정 관료의 한 사례가 된다.

임기를 황제가 정할 수 있는 이 임명을 통해 로마는 식량안보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원로원은 소유하고 있던 권한 하나를 또다시 내놓았고 군사를 보유하는 것과 버금가는 식량조차도 황제의 권한에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판테온(모든 신을 위한 신전, 즉 만신전) 건설자인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수임받은 건축, 가도, 수도 공사를 위해 기술자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기원전 12년 아그리파는 죽기 전 모든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남긴다.

유산 항목에는 기술자 조직의 대부분이었던 노예도 포함되었다. 사회간접자본 공사의 전문가들인 그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원로원 계급, 기사 계급, 평민, 해방 노예, 노예로 나뉘어 있는 로마 사회에서 한 단계를 건너뛰어 기사 계급에 포함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공공사업청을 신설하였다.

재정 중기에는 수도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가 십여 개에 이르렀을 만큼 물을 확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집정관 경험자가 이 수도국장 자리에 취임하도록 요구했다. 

식량은 자신과 후계자가 담당하고 물은 원로원에 맡긴 셈이다. 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사회 고위층이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고 있었다. 자기 일이 된 물과 관련하여 원로원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책의 방향성과 일관성을 잃기 시작했다. 황제가 빈번하게 바뀐 탓이다. 

2세기까지는 오현제 시대라고 일컬어질 만큼 훌륭한 황제가 연이어 나타나 안정적으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황제들의 재위 기간은 평균 20년이었는데, 3세기에 들어서면서 평균 4년으로 줄어들었다. 능력도 없는 황제가 그나마 황제라는 지위를 태평하게 누리려면 야만족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신들의 가호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야만족의 습격이 잦았던 3세기 로마 황제들의 실질적인 재위 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 위기를 타개할 묘책은 없었다. 요컨대 황제가 바뀌고 나라의 정치 지도자가 바뀐다고 해서 금방 눈부신 변화를 기대할 수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정해져 있을 테니 앞선 자가 누가 되건 간에 지속하여야 한다.

실제로 지속해서 진행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정책이란 꾸준히 이어가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느니만 못해 위기만 더욱 심화할 뿐이다.

반응형

댓글